상상할 수 없는 희망
잔혹 페미영화다. 재생산되는 여성주의 영화가 주장하는 끔찍한 방식이 코미디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영화. 비현실을 현실의 일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코미디라고 한다면, 정확히 코미디 장르가 맞다. 그렇게 표현된 현실 속에 짙은 사회성을 숨겨두었다면 그건 블랙이다. 이 영화는 몇개의 장르를 아우르며 결국 가 닿는 곳은 여성에 있다. 페미가 주가 되고, 나머진 표현방식으로써의 방법론들로 이해된다.
캠걸(성인 bj)루비, 배우 엘리즈, 작가 니콜, 이 세 친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셋 모두에게 공통 사건으로 등장하는 앞집 남자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여성적 시각의 부각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이웃집 여자가 남편을 살해한다. 그녀가 니콜을 찾아와 남편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이 아니라 119를 불러달라며 속시원하고 통쾌한 참지못한 웃음을 터트리는 두 여자. 죽은 남편이 니콜을 찾아와 아내를 찾는 장면에선 살인사건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관객은 혼돈에 빠진다.
발코니에서 바라본 앞집 남자의 초대로 건너 아파트로 넘어간 세 친구는 춤추고 술마시고 즐겁게 놀지만, 다음날 아침 루비의 몸에 묻은 피로 아연실색 정신차리게 되고, 남자의 집에 다시 간 세 여자들은 기괴한 모습으로 죽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기겁한다. 시신을 숨기고, 감춰두고, 토막을 내서 바다에 버리는 일련의 행동을 하는 과정에, 죽은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는 걸 알게 된 니콜. 앞집 남자의 집에는 다른 남자들이 우글우글 모였고 그들 모두가 저승에 가지 못한 채 남자의 집에 모여있는 영혼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여기서 이웃집 여자의 죽은 남편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설명된다.
이들 죽은 남자들은 모두, 여자를 강간하거나, 폭행해서 여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남자들이다. 그들 자신은 왜 죽어야하는지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피해자이므로 여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전에는 저승으로 갈 수 없다는 것. 이 정도로 남자들이란 죽어서도 정신 못차리는 존재들이다.
세 친구가 바다 위에 시체를 버리는 옆으로 다른 여자들도 같은 행위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한 떼의 여자들이 동행하여 걸어나가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은연 중에 사실이거나 가상이거나 그러한 심정으로 가득찬 여자들이 현실에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자, 그대 이름은 약자이므로, 연대하라.
당당히 가슴을 드러내고, 내가 몸으로 먹고사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니 내가 남에게 성적으로 헤프게 보일 이유가 없다는 루비. 그녀를 강간하려고 했던 앞집 남자를 밀어 그를 죽게한 것이라는 사실이 루비가 기억을 되찾으며 밝혀진다.
남편의 아이를 낙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엘리즈, 원치 않는 남편의 섹스를 참아온 그녀였다. 산부인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음부를 드러내고 진료를 받는 엘리즈의 치욕스러움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비단 그녀만의 몫이 아님을 대변한다. 여성에게 남성은 일상의 폭력 그 자체였던 것.
왜 죽은 자들이 니콜의 앞에만 나타나는가, 이는 그녀가 쓰고자하는 글과 관련이 있다. 앞으로 그녀가 쓸 소설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은 자들을 보는 것처럼 그녀만이 볼 수 있는 진실을 담아내는 글을 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까자 오면, 세상의 모든 남자가 여성의 적이다. 세상의 모든 남편이 그렇고, 카메라 저편에 벌건 성기를 꺼내놓고 앉아있는 변태들이 그렇고, 니콜의 눈에만 보이는 죽어도 죽지 못한 영혼들이 모두 그렇다. 저런 걸 외치기 위해 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끔찍한 모습으로 사람을 죽여야겠느냐는 반발과 불편함이 구역으로 올라오는 영화이기도 하다.
상상할 수 없는 희망, 희망이라는 말 자체가 미래를 말하는 단어이겠지만 지금 이 영화속 여성들에게는 그런 희망은 필요없다는 역설로 들린다. 희망이 현재의 희망이어야만 하겠다는 단단하고 절실한 호소로 다가오는 이 여성들의 절박함이, 최소한 세 여자들을 둘러싼 여성들의 연대에게는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