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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Hwiplash)

예술적 학대를 대적하는 예술적 자아의 힘

by 별사탕
위플래쉬.jpg

장르 드라마, 밴드, 음악, 스릴러

감독 데이미언 셔젤

각본제작 제이슨 블룸 헬렌 에스타브룩 미셸 리트박 데이빗 랭카스터

주연 마일스 텔러 J. K. 시몬스

촬영 샤론 메이어

편집 톰 크로스

음악 저스틴 허위츠

개봉일 2014년 1월 16일, 2025년 3월 12일[재개봉]

화면비 2.39 : 1

상영 시간 106분 (1시간 46분 28초)

제작비 330만 달러

상영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간에 걸치는, 공통분모와 개별분자가 섞여 한판 어울려 붙은 영화다. 음악과 교육의 문제, 집단의 지식에 놓인 개성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집단이 발전하는 이유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화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저마다의 서식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서식지는 서로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삶의 공간이다.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전체가 '문제없이' 공평하게 사는 집단으로 생존하게 된다. 나의 서식지, 영역이 외부로부터 침범을 당한다면, 그 주체가 권력을 가진 전문가라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진다. 일방적인 공격과 정복이라는 결과가 귀결점이며, 나의 서식지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지식의 세계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한쪽 영역에 의해 잠식당할 수 있고, 교육도 정치도, 전쟁도 기본적으로 그런 성격을 가진다.

이런 대결구도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정반합의 변증적 발전은 자와 타의 대결을 전제로한다. 특수하게 적이 내부에 있기도 한다. 후퇴하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발전하는 것, 거대한 나선형 구조를 가진 발전의 방향과 경로는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생물사회학적 조건이다. 그 가운데, 플레처와 네이먼이 있다.


셰이퍼 예술학교의 스튜디오 밴드 지휘자 플레처, 그가 이끄는 빅밴드는 학교를 대표하며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자존심을 가진 밴드다. 밴드의 사령탑, 교수 플레쳐는 기괴할 정도로 음정과 리듬에 민감하다. 그런 자신의 능력을 권력으로 삼아 밴드 구성원들을 혹사시킨다. 문제는 그 혹사가 육체적이라기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가스라이팅하는 방식으로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우울감과 공황으로 자살한 학생까지 있으니, 그의 교수방법은 지극히 가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밴드에 드럼 주자로 발탁된 네이먼은 버디 리치와 같은 전설의 드러머가 되는 꿈을 가진 순수한 영혼이다. 아무런 음악적 배경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연습과 자신이 향해가야 할 지점에 대한 동경이다.

둘이 격돌한다. 플레쳐는 가학적 행위를 지도방식으로 네이먼을 밀어붙이고, 네이먼은 온전히 그의 지도에 부응하기 위해 피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플레쳐의 제자가 죽었다. 교수의 폭압적 교수법에 희생된 것, 그러나 플레쳐는 마치 자신이 사랑하고 아꼈던 제자였던 것처럼 죽은 제자를 추모한다. 그런 모습에 밴드의 구성원 모두는 감동한다. 악마의 이면에 있는 천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위악적 행위 뒤에 플레쳐의 진짜 선한 캐릭터가 숨어 있다는 속임수, 이 속임수는 관객까지 속이면서 진실을 향해 드라마는 계속 이어진다.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 치고, 흥미진진하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선악의 두 캐릭터가 마주치는 모습이 극적 긴장을 유발한다. 그래서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의외로 이 영화는 디테일한 스토리가 없다. 모두 생략하고 보여줄 것만 보여준 취사선택의 묘미가 있다. 잔가지를 쳐버린 굵은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뼈대 스토리가 감동을 안겨준다. 단순한 모티프는 강렬하게 격돌하고, 뭔지 모를 결말처리는 여운을 주기에 충분하다.


플레쳐는 악의 화신이다. 학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인드 자체가 사악한 악마다. 제자의 죽음으로 인해 학교에서 퇴직한 플레쳐였지만, 네이먼의 퇴학 또한 플레쳐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이먼은 변호사에게 증언하지 않기로 한다.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우로 인해 그 반대편에 서있기 싫은 것이다. 네이먼 자신도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우린 이런 쪽을 선이라고 한다. 극명한 선악의 대립은, 극을 더욱 고조시키고 관객은 둘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에 빠져든다.

클럽에서 작은 재즈밴드를 운영하며 피아노를 치는 플레쳐는 망설이는 네이먼을 드럼 주자로 영입한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셰이퍼의 구성원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의 독립적 관계로 관계가 재설정된 상태에서 카네기홀에서 연주되는 공연이다. 세곡 중, 첫 번째 곡의 악보가 자기에게만 주어지지 않았다. 이건 약속과 다르다는 걸 직감한 네이먼, 연주는 지지부진하고 단원들의 불평은 네이먼의 귀를 파고든다. 네이먼에게 다가온 플레쳐가 낮게 내뱉은 말은 충격이다.


네가 찔렀다는 걸 다 알고 있다.


카네기 홀에서의 첫 데뷔가 이렇게 망신으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이런 상황을 플레쳐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자리가 플레쳐의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무대를 나갔던 네이먼은 재킷을 벗어던지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네이먼의 드럼으로부터 시작된 연주에 단원들이 음을 맞추기 시작한다. 플레쳐의 지휘도 따라오기 시작한다. 플레쳐가 그렇게 네이먼을 괴롭힌 속사연주 부분도 어렵잖이 지나가고, 연주는 마무리되며 피날레를 장식하는가 싶은 순간, 드럼이 멈추지 않고 플레쳐는 당황한다.

여기서부터 진짜 재즈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멈출 수 없는 리듬의 감각들, 마무리되지 않은 가슴속의 감정 찌꺼기들을 음악을 통해 모두 토해내기 전까지는 드럼을 멈출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네이먼은 자신의 몸으로 먼저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플레쳐, 그도 더 이상 네이먼을 제지하지 못한다. 플레쳐가 보여주는 몇 번의 미소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드럼의 타격, 네이먼의 미소가 이 가학적 인물을 압도한다.

따지고 보면, 선악의 스토리전개에서 선이 승리한다는 뻔한 스토리 구조다. 위플러쉬에 나오는 두 주요 인물, 네이먼과 플레쳐가 돋보이는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악은 끝까지 악의 기능을 소화해 내고, 변수가 작용하는-흔들리는-선은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위기나 고난을 이겨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낸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파괴와 분열, 실패와 좌절은 자신이 선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데서 온다. 바보 같아도, 어리석게 보일 수 있어도, 비록 어설퍼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도 '끝내 이기는' 자들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악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선 쪽에 서있기로 한 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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