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출간

by 별사탕

조해일의 왕십리를 읽은 직후였다. 주인공이 조직의 살인 전문가로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첫사랑 이야기였다. 스무살, 소설을 쓰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으로 20대를 다 보냈고, 생각으로부터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30대가 지나갔다. 그 때 알았어야 했다.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내게 지난 시간들은, 인생이란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나의 경우,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낼 줄 모르는 반편이 기질이 있어 그나마 하고 싶었던 일에 매달렸어야 했다. 그것이 당분간 혹은 긴 시간 동안 벌어먹고 살지 못할 시련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했어야 옳았다. 그런 연유로 내게 대학은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한꺼풀 더 뒤집어 쓰는 행위와 같았다. 학식은 이중적 내면을 갖게 했고 그것이 만든 안일하고 비겁한 세계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생 자체가 거대한 슬픔의 도가니이면서, 모순과 불합리의 우연적 충돌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삶에 나를 던져 복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늘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은 충실 목표 노력 실천 계획 이런 단어들이었다. 하루의 끝에서만 보게되는 서쪽 하늘의 오렌지빛 노을같은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잡물들이 깡그리 무소용한 헛것이라는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파면 팔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의 수렁 속으로 발목이 잡혀 끌려들어갔다. 그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책을 읽다 지쳐면 또 책을 읽었다.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만성적 우울에 빠지면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스토리 하나라도 챙기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놀며 장독이나 깬다는 심정으로 극장을 출입했다.

부산, 서부, 영남, 아폴로, 삼양, 대지, 미아리, 미도, 동보… 엄마 손에 붙들려 다녔던 그 때부터 익숙해진 모든 극장은 내 삶의 영역을 확장시켜주었다. 물리적 공간으로써도 그렇고 관념적 공간으로써도 그랬다. 삶에서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성장을 뜻했다. 서울 중앙 명보 대한 국제 국도 단성사 스카라 허리우드 서울 시내 극장으로 진출하면서 동네 극장에서 보던 동시상영 문화가 중심가에 못미치는 삼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름이 튀거나 끊어지면 즉각 거침없이 터져나왔던 야유와 휘파람, 여기 저기서 피어올랐던 담배연기와 앞좌석 위로 걸쳤던 다리들, 비가 주룩주룩 내렸던 화면이 꺼지면 땅콩 오징어 사탕 껌과 사이다를 팔았던 소년들이 인터미션의 시공을 훑고 지나갔다. 익숙하고 정겨웠던 극장의 풍경들이었다.

내 청년의 윗목은 어두운 극장 좌석의 한 켠이었다. 기형도가 종삼 파고다 심야극장에서 숨을 쉬지 않고 있을 때 나는 명동극장 한 쪽에 앉아 있었다. 극장이 상징하는 만큼의 죽음이 배경으로 깔렸다. 그가 죽자 90년대의 새로운 서정이 열렸다고 했다. 나는 그의 죽음을 동경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죽음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알았던 것 같다. 그길로 나는 입대했다.

세월이 좋아져서 인터넷에 누구할 것 없이 글을 올리고 작가 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었다.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나 역시 대번에 작가가 되었다. 5000자씩 80회를 연재했으니 400,000자를 써제낀 셈이다. 넉넉 잡아 장편 한권을 20만자로 산정한다면 장편 두권 분량을 쓴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40만자씩이나 뭘 썼을까? 주체할 수 없었던 욕망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겼다. 익명을 빌어 그 세계의 바닥을 볼 것 처럼 들추어냈다. 정신에도 뒷골목 삼류가 있다면, 그 세계는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3류중 가장 저급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혼란케하는 욕망과 욕구의 범주에 속했다. 고상한 문체로 쓰여진 욕설같은 글이었다. 그렇게 쓴 글은 플랫폼에서 자동출간되었고, 이후 가끔 화면을 들여다보며 구독과 조회수를 살피며 수익금 정산 메뉴를 클릭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내 글이 양지로 나올 때가 되었다. 그 첫번째 작업의 결과물이 정식 출판과정을 거쳐 교보문고에 진열되어야 한다. 3년에 걸쳐 쓴 영화글들을 모아보니 100편이 넘었다. 이걸 일정한 틀로 형식을 통일하고, 전체를 가지런히 보일 수있도록 교정 교열, 퇴고해야 할 편집과정이 남아있다. 시간이 관건이다. 신창에 앉아서 해야할 일이 한 가지 더 생긴 셈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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