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바라볼 때
감독 마샤 쉴린스키
각본 마샤 쉴린스키 루이제 페터
출연 한나 헥트 레아 드린다 레나 우르첸도프스키 라에니 가이젤러 주자네 뷔스트 루이제 하이어 외
촬영 파비안 감퍼
편집 에벨린 라크
미술 코지마 펠렌처
음악 미하엘 피들러아이케 호젠펠트
의상 자브리나 크래머
화면비 1.33 : 1
상영 시간 155분 (2시간 34분 49초)
상영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제목을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번역해도 될까? '무너지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가슴이,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하면 아픔과 연결이 되고, 장벽이 무너진디고 말 할 때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허물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너지는 소리는-단지 무엇이 물리적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크게 보면 세상을 향한 혹은 세계가 가한 형벌같은 무게를 가진 그 어떤 무형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너져 내림'의 현상, 행위는 인간의 삶에서 불가분한 동반이 따른다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여성이 부각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한, 등장인물 여성들을 두고 4세대라고 하는데 꼭 그렇지 않다. 이들의 관계는 혈연의 세대연속성도 있지만 혈연이 아닌 인물도 있어 대를 이어 벌어지는 연대기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서사의 연결이 끊어지고 영화는 날 것 그대로의 난독 상태가 되어, 보는 자로 하여금 피로감마저 들게 한다.
알마가 보는 세상은 곳곳에 산재한 죽음이다. 어머니가 죽고, 할머니가 죽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도 본다. 놀이 조차도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세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듯, 세상을 향한 완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언니마저 죽음을 향해 떨어져 버린다. 알마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생이란 오직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행렬'일 뿐이다. 이렇듯 세상(삶)과 죽음은 한 몸이다.
남자들이 전쟁터로 내몰릴 때, 뒤에 남은 여자들이 보는 것, 그것은 함께 몰락하며 스스로 목숨을 중단해 버리는 여성의 삶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 거대한 부정과 폭력의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할 뿐, 그래서 그 결과는 모두가 함께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1대(1910년대)-부모 세대가 있다. 한 가족이 1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다. 큰 아들 프리츠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팔목을 절단하려 하나 그 과정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고 만다. 그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 장애를 겪는 어머니는 죽음에 이른다.
2대(1910년대)-알마(한나 헥트), 알마의 큰언니 리아(그레타 크래머). 알마가 바라보는 집안을 뒤덮고 있는 죽음, 그것을 엿보는 형태로 하나하나의 죽음을 보여준다. 자연적인 죽음보다 불상사에 따른 죽음의 의미가 더 큰 시대적 죽음을 보여준다.
3대(1940년대)-에리카(레아 드린다)와 그녀의 언니 이르므(클라우디아 가이슬러바딩). 에리카는 프리츠의 조카다. 따라서 알마의 조카이기도 하다. 에리카가 목발을 짚고 외다리를 흉내내는 대상은 프리츠다.
그런데 프리츠의 얼굴이 아니다. 늙어 있다.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프리츠의 늙은 얼굴이 서사의 구성 맨 앞에 등장하므로 관객은 시간을 혼동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혼란스럽다.
에리카는 강을 건너 서독으로 넘어가고 그 언니 이르므만이 집에 남게 된다. 물 속의 장어 때문이었다.
4대(1980년대)-이르므의 딸 앙겔리카(레나 우르첸도프스키). 앙겔리카는 삼촌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한다. 삼촌의 아들 또한 그녀에게 관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놓여있는 모든 상황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웅크린 사슴처럼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일.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 가족 이마을 이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이 나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그녀가 죽음대신 택한 것은 이 세계의 현실로부터 사라지는 것이었다.
5대(현대)-베를린에서 이주해 온 렌카(레니 가이젤러)와 그녀의 동생 넬리(조이 바이엘). 4대까지가 혈연관계의 연속이다. 안에서 밖으로 공간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구조였다면, 이후에는 무연고의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공간이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며 욕망 또한 내면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을 건너왔다는 카야와 놀면서 물 속의 장어가 익사 직전의 렌카를 살린다. 어머니와 렌카의 돈독함에 소외감을 느끼는듯 여동생 넬리가 자살을 선택하는 의외의 죽음을 보여준다.
시대가 안겨주는 고통과 시련이 죽음에 이르게하는 행동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내면화된 고통이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죽음관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시간을 관통해 흐르는 이 모든 고통들이 특히 여성의 내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은 고통의 부피나 크기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남성의 그것과 견줄 것도 아니다. 세계를 안고 그 세계와 함께 돌고 돌아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한다. 존재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돌고 돌아가는 시간은 어느 특정 성에만 해당할 것도 아니요, 어느 특정 시대에만 해당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느 한 편에서 이 영화를 논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 한쪽 눈으로 보거나 세계의 무게를 너무 좁게 보는 행위다.
프리츠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안정시키고 살려내는 방법을 보여주는 여자다. 자신을 버려 한 생명을 구해내는 방식은 다름 아닌 성적 위무다. 죽음과 욕망은 두 얼굴을 가진 한몸인 것이다.
밤새도록 처절했던 고통의 비명을 멈추게 한 것. 죽음을 이기는 생명, 서구인들이 성적 기제를 삶의 현장에서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의 근간을 엿볼 수있다. 이것은 죽음에 대처하는 상징적 방식이기도 하다. 장어에 대한 메타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어렵게 만든 이유는, 설명없는 필름을 조합해놨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인물에 대한, 그래서 인과에 대한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다리가 잘린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럼 저 엄마가 그때의 그집 딸이었나? 라든가, 심지어 치료를 위해 합곡혈을 깨물게 하는 장어가 반복 등장하면서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오리무중이 되어 버린다.
거기에 한몫 더 해, 외국인 관객인 우리는, 심하게 배우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막을 구분하는 내레이션 목소리 구분 역시 하지 못하며 객석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면, 그 비법은 단 하나다. 한번에 알아내지 못한 표현 요소들을 알아내기 위해 재차 관람해야 할 필요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사운드는 기괴하다. 화이트 노이즈 같았던 소리가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대폭발후 들리는 이명같은 소리들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 수확물들을 모아 놓은 밭을 향해 불어오는 거대하고 거친 바람에게로 달려간다. 이 장면은 마치 이 험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모습같다. 인간은 이 거대한 재앙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흐름을 타는 것이다. 맞서 싸우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마치 연이 된 것처럼 바람을 타고 몸을 그 바람에 맡겨 바람 속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어야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지상으로부터 벗어나, 세상 위로 떠오르게 된다. 공중에 떠 있을 때에만, 더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 감독이 만든 세계 속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이 순간 때문이다. 그래야만, 인간은 '태양'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들 중 누가 쿠페르티노 신부(St. Joseph of Cupertino)처럼 어쩔 수 없이 성인이 될런지!(The Reluctant Saint) 아니면 쿠페르티노를 따라 천국에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