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울어진 것에 향하는 마음
자연은 쉬지 않고 변하기도 하지만 바라보는 이의 상태와 마음에 따라서도 다르게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한 날, 틈새에서 당당하게 피어난 풀꽃에 유난히 감탄하거나 쓰러질듯한 나무에 더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풍경화가 가장 많이 제작되고 소비된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을 살펴보던 중, 기울어진 나무가 주인공인 그림에서 그런 화가의 마음이 전해졌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알고 보니 몇몇 화가에게 영감을 주어 판화로 제작되었다. 이 그림에 매료된 고흐가 판화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한 그림을 통해 여러 화가들과 나의 마음이 연결되는 것은 묘한 황홀감을 주었다.
해가 저물며 그림자를 드리운 오후, 오른편 나지막한 언덕길을 따라 한 사람이 걸어간다. 모은 나뭇가지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그의 주변에 개 몇 마리가 함께 한다. 왼편에 펼쳐진 들판과 개울 너머, 멀리 하를렘의 성 바보(Bavo) 대성당이 보인다. 중심에는 경사면에 자리 잡아 사선으로 자라고 있는 나무 덤불이 눈길을 끈다. 하늘에 뭉게구름은 나무와 반대 방향으로 솟아 있고, 잔잔한 햇살이 뒤쪽 들판과 언덕길에서 반짝인다.
야콥 판 라위스달(Jacob van Ruisdael, 1628/29~1682)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태어난 하를렘(Harrlem)은 숲이 우거진 모레 언덕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로, 17세기 초 이곳의 화가들은 네덜란드 풍경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풍경화가인 아버지와 삼촌의 피를 물려받아 라위스달은 이른 시기부터 놀라운 풍경화를 그려냈다.
<멀리 마을이 있는 풍경>은 평화로운 하를렘 근교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오른편에 강렬한 존재감을 품어내는 풍성한 오크 나무가 서 있고, 왼편에는 개울과 들판, 그 뒤로 마을과 성당이 보인다. 봇짐을 메고 걷는 사람과 개울가에서 쉬고 있는 사람은 인형처럼 작아 풍경에 동화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하늘에 뭉게구름과 풍경을 따듯하게 물들이는 햇살, 만져질 듯 생생한 전경의 흙과 마른풀들까지,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었다.
당시 풍경화가들이 나무를 풍경의 장식적인 구성 요소로 배치했다면, 라위스달은 풍경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주인공으로 제시했다. 세밀한 묘사와 풍부한 색조로 붓질을 쌓아 올려 나무에 개성과 깊이를 더한 것이다. 라위스달이 18살에 그린 이 작품은 대가의 천재적인 실력을 입증한다. 2년 후 스무 살의 청년은 하를렘 화가 길드의 회원이 된다.
작은 패널에 그린 <여행자가 있는 풍경>에서도 유사한 모티프가 반복된다. 중심에 네덜란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크 나무가 있고 오른편에 두 갈래의 길이 뻗어 있다. 여행자는 강아지와 함께 왼쪽 길로 향하고, 오른쪽 길 멀리엔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이 보인다. 이런 네덜란드의 시골 풍경화는 풍경화의 소비자이기도 한 도시인들의 집을 장식하며 평온의 순간이나 자연에서의 여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라위스달의 풍경화에서 특징적인 '길'은 보통 끝을 알 수 없는 굽이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보는 이가 쉽게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전경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길은 우리네 인생을 은유한다.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17세기에 길은 또한 진리이자 생명이신(요 14, 6) 예수님을, 또한 구원으로 향하는 삶의 여정(순례)을 의미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칼뱅교를 국교로 한 네덜란드에서 상업 도시의 시민들은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는 삶을 추구했고, 소명에 따라 자기 직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즉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갈림길에서 좁은 길로 향한 여행자를 보고 넓은 길로 가지 말라는 말씀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 7, 13~14)
1650년대 초반 라위스달은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서쪽 지역을 여행하며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특히 저지대인 네덜란드와는 다른 풍광을 가진 북유럽의 울창한 숲과 계곡은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의 스케치를 기반으로 이후 라위스달은 야생의 웅장한 자연을 큰 화폭에 그려 나갔다.
그 가운데 <숲 장면>은 독일에서 본 숲 속 풍경을 담아낸 것이다. 초록 나무가 빼곡한 후경에서부터 풀을 뜯는 양과 오솔길을 걷은 커플을 지나면 계곡에 이른다. 풍성한 나무들, 바위를 덮은 이끼와 풀, 우리 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에서 숲의 청량감이 오감으로 느껴진다. 이런 생생한 묘사 때문에 영국의 존 컨스터블을 포함해 바르비종파의 테오도르 루소나 이동파의 이반 시슈킨까지, 수많은 풍경화가들이 라위스달의 작품을 모사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른편에 부러져 쓰러진 흰 껍질의 자작나무다. 생명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숲 속에서 소멸되는 것을 전면에 배치해 삶의 덧없음을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 시기 라위스달은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해 이런 기념비적인 숲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소박한 네덜란드의 풍경을 그린 작은 풍경화에 비하면 그에게 더 큰 수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풍경에 폐허를 삽입해 상징성을 더하거나 선배 화가들처럼 드넓은 하늘과 구름, 대기의 효과를 실험하고 해양 풍경화에도 도전하며 다재다능함을 드러냈다.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라위스달은 자연에 대한 감정과 정서를 누구보다 잔잔하고 솔직하게 표현해 나갔다. 괴테는 흠모했던 이 화가를 '사고하는 예술가이자 시인'이라 평가했다.
다시 스무 살경에 그린 대표작으로 돌아가보자. 라위스달은 몇 년 차를 두고 보통 사람은 잘 눈여겨보지 않을 듯한 이 잡목 덤불을 두 번 더 그렸다. 두 해 전에 그린 왼쪽 작품은 휑한 나무와 풀이 갈빛인 것으로 보아 늦가을인 것 같다. 대표작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오른쪽은 초록의 기운이 가득해 늦봄이나 초여름처럼 느껴진다. 등장인물에 변화를 준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좀 더 멀리서 조망한 풍경이다.
그런데 유독 대표작 <잡목 덤불>에서 멜랑콜리의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두 작품과의 차이라면, 언덕길을 오르는 한 사람만 등장하는 것, 더 가까이 다가가 나무 덤불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 무엇보다 나뭇잎이 무성해 기울어진 나무가 지탱하기 더 힘겨워 보인다는 것이다. 더불어 해 질 녘에 잔잔하게 깃든 노란빛이 이 드라마에 감성을 더한다. 그날 화가는 같은 풍경에서 다른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어쩌면 홀로 걷는 이의 외로움, 분투하는 나무의 힘겨움 같은.
라위스달이 세 차례나 이 나무를 그리고, 고흐를 포함해 몇몇 화가들이 이 그림에 매료되고, 또 내 마음에서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한 마디로 그것은 기울어진 것에 향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레 언덕 경사면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하늘을 향하려는 본성과 땅의 중력 사이에서 투쟁하며 사선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곧추선 나무에 비해 기울어진 나무의 뿌리는 엄청한 노력을 뻗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러 나무의 뿌리들이 서로 엉켜 함께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명처럼 씨앗이 이곳에 던져져 남들과 다른 위치에서 다른 모양새로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시선과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불편한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 쓰러져가는 나무에 누군가 부목을 덧대주는 것처럼. 기울어진 나무에서 느껴지는 것은 연민과 애처로움만이 아니다.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뻗어가는 모습은 때때로 곁에 있는 이에게 더 큰 힘과 용기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