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명상으로 들어가는 문
가을이 되면 더 자주 동네 산으로 향한다. 자연은 섬세하게 오감을 건드리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초록의 잎들은 자기만의 수많은 색채로 물들고, 가을바람에 흩날리다 근사하게 낙하한다. 메마른 낙엽은 푸근한 내음을 풍기며 서서히 땅과 하나가 된다. 발걸음 따라 들리는 바스락거림, 바람이 연주하는 잎의 떨림, 그 템포와 상관없이 새가 지저귀고 도토리와 밤이 우두두 떨어진다. 전위 음악 같은 가을 교향곡이 잦아들 즈음, 언제나처럼 클림트의 고요한 숲그림이 떠오른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숲 속에 너도밤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다. 아래로 향한 시선 때문에 가느다란 몸통들만 시야에 들어온다. 카펫 같은 바닥에 늘어선 나무들이 저 멀리까지 이어진다. 지평선과 나무에 어른거리는 푸른빛에선 이른 아침의 한기가 느껴진다. 눈길은 정적이 가득한, 길도 없는 늦가을 숲 속을 하염없이 떠돈다.
<키스>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그만의 독창적인 인물화만큼이나 독특한 풍경화를 남겼다. 빈 외곽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묘 실력이 뛰어났던 소년은 응용미술학교에서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등의 기술을 배웠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클림트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생, 친구와 ‘예술가 컴퍼니'를 설립해(1879) 십여 년을 공공건물을 장식하는 일을 했다. 클림트를 알린 초기의 벽화와 그림들은 이후 유명한 황금빛 그림들과는 매우 다른 아카데미의 고전적인 역사화 양식을 따르고 있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환상형 도로인 링슈트라세를 따라 바로크식의 공공건물이 들어서며 변모했다. 여러 민족이 공존했던 제국은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반세기 이상 제국을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검열과 감시로 사회를 옥죄었다. 관료와 귀족은 물론 시민들조차 변화를 두려워하며 점차 정치를 외면하고 사교와 예술에 몰두했다. 카페 문화가 번성하며 아방가르드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망도 커져갔다. 구스타프 말러가 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성에 대한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던 세기말의 빈에서 클림트도 활약하고 있었다.
일감이 이어지며 승승장구하던 1892년, 아버지와 함께 일한 동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클림트는 충격으로 한동안 작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작업의 방향도 고민했을 것이다. 이후 빈미술가협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화되자, 1897년 클림트는 일군의 예술가들과 협회에서 탈퇴해 '빈분리파'를 이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라는 모토가 말해주듯이, 이들은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현재의 세상과 진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또한 분리파 전시관을 건축해 소속된 예술가들의 작품과 유럽의 새로운 미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특히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예술과 건축에 큰 영향을 받아, 회화와 조각, 건축의 총체적인 작업을 지향했다.
클림트의 언어도 점차 변화되었다. 몸과 섹슈얼리티를 대담하게 그려나갔고,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모티프와 구성도 반영했다. 금색이 화면에 들어왔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의미를 담아낸 상징성도 더해졌다. 1894년에 의뢰받아 오랜 습작을 통해 완성한 빈 대학 강당의 천정화 디자인은 결국 엄청난 스캔들을 낳았다. 학교는 학문의 위대함을 기리는 벽화를 기대했건만, 클림트의 <철학>과 <의학>, <법학>(1898~1907)은 거리낌 없는 누드의 여인, 혼돈 속의 인간을 통해 세상의 고통과 죽음, 부정을 해결하기 어려운 학문의 한계를 암시했다. 교수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추악한 포르노그래피라 비판하며 설치를 거부했다. 1900년을 전후로 비평계와 국회로까지 논란이 확장되자 결국 클림트는 보수를 돌려주고 작품을 회수해 버렸다. 이후 화가는 1902년작 <금붕어>에서 풍만한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는 여인을 통해 그를 비판했던 평론가들에게 응수했다.
빈분리파의 수장이 되고 스캔들이 시작된 시기, 클림트는 죽은 동생의 부인, 플뢰게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처제의 동생인 에밀리 플뢰게는 그의 연인이자 뮤즈가 되었고, 평생 의지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남는다. 1900년부터 이들은 매년 여름을 잘츠부르크 인근 산중에 있는 아터 호반에서 보냈다. 클림트는 수영과 보트 노 젓기를 즐겼고, 가끔 소풍과 사교 모임에도 참석했다. '천국의 호수'로도 불렸던 이곳에서 그는 온전한 휴식과 자유를 누렸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 영감을 받아 클림트는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다. 초기 풍경화에서는 (신) 인상파와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 등에 영향을 받은 실험들이 엿보인다. 그 가운데 <큰 포플러나무 I>는 과일나무와 키 큰 포플러 나무를 조망한 풍경화다. 언뜻 인상파 그림과 유사해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본 데다 섬세한 붓질로 묘사된 아스라한 대기 효과 때문인지 꿈결 같은 인상을 전한다.
비슷한 시기에 클림트는 대표작 <너도밤나무 숲 I>와 같은 가을숲 풍경화를 여러 점 그렸다. 비슷한 구성을 보여주는 <자작나무 숲>에서는 초록잎과 이끼, 보라꽃이 가을 풍경에 생기를 더한다. 자작나무 껍질의 독특한 문양과 가늘고 굻은 반복적인 몸통들도 화면에 리듬을 더한다. 풍경이 자아내는 색조와 문양이 강렬한 이 작품이 보는 이에게 활기를 준다면, 가라앉은 톤의 대표작은 마음을 보다 차분하게 만든다. 잎을 떨구고 최소의 몸짓으로 선 나무들은 클림트가 이후 줄곧 그린 풍성한 나무들과는 다른 평온을 전한다. 아터호에서 아침마다 숲 산책을 즐겼던 클림트는 이런 광경을 마주하며 도시의 번잡함과 소란을 떨쳐냈을 것이다.
무엇이 이렇듯 클림트의 풍경화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림을 마주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사라지고 종종 명상에 빠지게 된다. 그의 풍경 속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하늘도 점차 최소화된다. 나무와 풀, 꽃으로 가득 찬 화면은 벽처럼 보는 이를 에워싼다. 거기에선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게 그렇게 영원히 고정된 듯하다.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날씨나 빛의 효과에 집착한 인상파 풍경화와 다른 지점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사각형의 캔버스는 보통의 수평적 구성보다 균형과 평화의 세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클림트는 아터호에서 인상파 화가들처럼 야외에서 작업했는데, 흥미롭게도 망원경이나 보드지로 만든 정사각형 뷰파인더를 통해 풍경을 관찰했다. 맨눈보다 풍경은 더 납작해 보이고 원하는 부분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클림트는 모네의 수련 연작에서 화면을 뒤덮은 연못이 경계를 넘어 확장되는 효과도 주목했다. 위에 아터 호수를 그린 작품에서도 에메랄드빛 수면은 화면을 넘어 퍼져가고 보는 이의 마음도 확장된다. 그가 말했듯이 정사각형 캔버스는 평화로운 분위기로 침잠하게 하고, 대상은 신비로운 우주의 한 조각으로 존재하게 된다.
"정사각형은 대상을 평화로운 분위기 속으로 잠길 수 있게 만드는 최적의 형식이다. 정사각형을 통해 그림은 우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풍경화는 여름휴가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배나무>처럼 풍성한 초록 풍경이 대부분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초록과 노랑, 파랑의 붓질을 떠돌다 보면 나뭇잎과 열매, 사이사이의 하늘이 스쳐간다. 이런 색점들은 당시 빈분리파 전시에 소개된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연상시킨다. 이들이 색채학 이론에 근거해 원색의 색점으로 색조를 구현했다면, 클림트의 붓질은 하나하나가 형상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상단에 무한히 퍼져나가는 색점으로 마음에 활기가 더해지고, 하단의 나무 몸통들 사이사이에서는 공간이 주는 여유를 누리게 된다.
이런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클림트의 언어는 1903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특히 라벤나에 있는 산비탈레 성당을 장식한 황금빛 모자이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경과 믿음을 담아낸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는 1500년이 지나서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과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자이크는 여러 색의 돌과 금으로 제작되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기법상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형상이 구현된다. 그런 중세의 양식이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와 신비, 위엄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클림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모자이크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는 클림트의 풍경화도 천상의 자연과 같은 영원성을 품게 되었다.
내향적이면서도 향락주의자였던 클림트는 여성이든 자연이든 탐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표현했다. 그는 고독과 산책을 즐겼고, 자신과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극도로 꺼렸다. 분리파 내부의 분열이 확대되자 1905년 그곳마저 탈퇴하고 은둔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클림트는 주로 부유한 부인들의 초상을 그리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렸다. 빈의 작업실에 그는 상주하는 모델들의 은밀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담은 수백 장의 드로잉도 남겼다. 여러 모델들과 정사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주문한 상류층 부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화가는 작업실 주변에 매년 다른 꽃들을 심을 만큼 정원 가꾸기를 즐겼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휴식과 영감을 얻었다. 클림트의 여성 초상화는 금빛과 문양들, 화려한 꽃과 동양의 모티프로 장식되며 점점 더 화려해졌고, 당시 부유층의 여인들은 그를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클림트의 초상화만큼이나 풍경화는 오랜 황제의 제국에서 화려함을 지닌 채 변치 않기를 바라는 시대를 또한 함축한다. 자연은 마치 초상화의 여인들이 그랬듯이 호화로운 장식처럼 박제되었다. 세기말 클림트는 여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열렬히 탐했던 만큼이나 인간 운명과 자연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클림트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암시한 말년의 <죽음과 삶>(1910~5)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여겼다. 그의 헐렁한 작업복에는 항상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파우스트』가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보이는 찰나의 자연에 집착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클림트가 변치 않는 지상의 천국을 담아내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도 그의 캔버스 속에서 시공간을 잊은 채 유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