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견디는 기쁨
오랜 시간을 지나온 것이 풍기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다. 물건도, 인간도, 나무도. 그 형상과 피부에 차곡차곡 더해진 풍파와 감정과 이야기는 존재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인상 깊은 노인을 만나면 간혹 그분의 청년 모습을 떠올려볼 때가 있다. 수백 년을 자라온 보호수 앞에 서면, 시간을 되돌려 많은 씨앗들 가운데 하나가 싹을 터 올린 순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태껏 살아낸 생명은 수많은 겹과 함께 다가온다. 얀 판 호연의 오크 나무도 그런 긴 여운을 남긴 나무 중에 하나다
나지막한 언덕에 선 두 그루의 오크 나무. 울퉁불퉁 기울어진 몸통은 크게 패인 곳도 있고, 굽이굽이 뻗은 가지도 여럿 부서져 있다. 그럼에도 소박하게 잎을 피워낸 고목(古木)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무 아래 두 남자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저기 봇짐을 메고 가는 이도 보인다. 뒤로 펼쳐진 낮은 평원에는 작은 마을과 멀리 강줄기가 보인다. 드넗은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한 줄기 햇살이 나무와 언덕에서 반짝인다.
서양에서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17세기, 얀 판 호연(Jan van Goyen, 1596~1656)은 자국의 풍경을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 중에 하나다.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는 성경과 신화의 이야기가 삽입된 '고전주의 풍경화'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전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목가적인 이상향을 그린 클로드 로랭과 숭고한 교훈을 담아낸 니콜라 푸생의 풍경화에 열광했다. 그런데 스페인으로부터 막 독립한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볼품없는 저지대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낮은 수평선과 구름이 잔뜩 낀 광대한 하늘, 척박한 모레 언덕과 허름한 농가, 강과 운하와 풍차가 작은 화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만의 허식 없는 풍경화는 그림의 수요자이자 관람자인 중산층 시민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조선업과 해운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는 전 세계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부유한 중산층이 두터웠고,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는 등 자본주의 문화가 뿌리내렸다. 칼뱅교를 공식 종교로 삼았지만(1579) 종교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교육 수준이 높은 수공업자와 상인, 지식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17세기 네덜란드는 경제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이 꽃피는 황금시대를 맞는다.
개신교 교회와 귀족의 주문이 드물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섰다. 중산층이 구매할 수 있는 작은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뱅이 『기독교강요』(1566)에서 초상과 정물, 풍경 등 보이는 세계를 그리길 권고한 데다, 화가들은 주문 시스템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시장이 형성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장르는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수준 높은 그림들을 여염집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17세기 네덜란드는 그래서 미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으로 여겨진다.
바다와 외세로부터 지켜낸 낮은 땅
호연은 1620년대 후반 허름한 농가와 굽이진 길, 조그만 사람들이 등장하는 모래 언덕 풍경을 반복해 그리며 그만의 단출한 조형 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그 가운데 <모래 언덕의 길>은 메마른 땅과 하늘 사이에 군데군데 작은 나무들, 어디론가 가고 있는 두 인물만이 등장한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이런 초라한듯한 풍경화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연의 풍성함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척박한 풍경에 나는 왜 평온함을 느낄까?
'낮은 땅'을 의미하는 네덜란드는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고 절반 이상이 해발 1m도 되지 않는다. 수백 년 동안 잦은 범람 속에서 저지대의 주민들은 제방을 쌓고 풍차로 물을 퍼내며 삶의 터전을 지켜왔다. 바닷물의 영향으로 저지대에서는 곡물도 나무도 풍성하게 자라지 못했다. 한 프랑스 여행자가 '이곳은 사람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런 환경은 실리적이고 위기에 강한 네덜란드인을 만들어냈다. 특히 호연이 활동했던 시기에 진행된 대규모의 간척사업은 바다를 면한 홀란트주의 풍광을 변화시켰다. 이에 속한 부유한 도시들, 암스테르담과 헤이그, 하를렘 주변은 도시민들이 구경하러 올만큼 광활한 모래 풍경으로 유명했다.
바다 말고 네덜란드를 위협했던 것이 있었다. 플랑드르(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대) 지역은 15세기경부터 차차 17개의 자치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 지역이 16세기 초 (가톨릭)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에 편입되면서, 자유를 누렸던 각 주가 경제적 통제와 종교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저항 운동이 확대되며 북부 7개 주는 1581년 독립해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지만, 남부는 1609년까지 이어진 투쟁에서 결국 스페인령으로 남게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에서 시민들은 실질적인 행정 운영의 주체였다. 그림의 고객이기도 했던 이들에게 낯익은 저지대의 풍광은 바다와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확장한 땅에 대한 자부심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고요한 모래 언덕이나 소박한 농촌의 풍경은 번잡하고 피곤한 도시민들에게 일상과는 다른 시각적 즐거움과 마음의 휴식도 선사했다. 신실하고 검소한 프로테스탄트였던 대다수의 시민에게 피조물인 자연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섭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풍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하늘은 신이 구름을 수레 삼아 바람 날개로 다니는 궁전(시 104:3-4)이기도 했다. 모래 언덕에서도 신을 보았던 이들은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사소한 것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줄 알았다.
“창조주의 선하심이 모든 모래 언덕 위에 나타난다” - 네덜란드 시인 콘스탄틴 호이겐스
오크 고목, 삶을 견디는 기쁨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인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자연과 주변 현상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과 인생의 교훈을 전달하는 문학적, 시각적 전통이 대중화되었다. 그래서 대표 그림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쇠락한 나무는 생의 일시성을 전달하고, 한가로운 두 인물은 나태함을, 봇짐을 메고 떠나는 인물은 저기 마을의 교회, 즉 영원한 도성으로 향하는 순례자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읽었던 사람이 있을지라도, 호연의 그림 앞에선 설득력을 잃는다. 삼백 년쯤 후에 반 고흐가 "호연처럼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라 말하며 이 대가를 칭송했듯이, 그들 일상의 한가로움과 여정은 그 자체로 휴식과 평온을 전한다. 무엇보다 풍경에서 눈길을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은 주인공 오크 고목이다. 오랜 세월 언덕에서 살아온 이 나무는 지속된 범람과 풍광의 변화를 지켜보며 네덜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온몸으로 맞았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림처럼 여지없이 나무 아래서 잠시 머물렀을 터이고.
육중하고 단단한 오크 나무는 쓰임새가 많아 당시 네덜란드의 시골과 간척지에 널리 심겼다고 한다. 집안의 가구는 물론 큰 배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화가들은 오크 패널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634년 작품에도 늙은 오크 나무가 중심에 서 있는데, 이번에는 농가를 배경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쓰러질 듯 사선으로 뻗은 이 나무도 여기저기 상한 모양새지만 거친 땅에서 제법 잎을 피워냈다. 나무와 더불어 쓰러질듯한 낡은 판잣집은 이곳 농부들의 각박한 삶과 고난을 연상시킨다. 여기서도 구름 사이로 비춘 햇살이 나무와 모래 언덕에서 반짝인다.
레이덴에서 태어나 1632년경 더 큰 도시 헤이그에 정착해 제법 알려졌던 화가 호연은 곧 들끓는 욕망에 휩싸이며 호된 시련을 겪었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그림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입된 사치품으로 은은하게 집을 꾸미고, 넘치는 현금은 간척 사업이나 증권 시장으로 흘러들어 갔던 시대였다. 터키에서 수입된 진귀한 꽃 튤립에 대한 열광으로 심지어 피지도 않은 튤립 구근의 값이 치솟았는데, 이때 호연도 투자했다가 튤립 파동(1637)을 맞으며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호연의 전략은 다작이었을까. 그가 남긴 1200여 점의 유화는 대표 작품에 비해 작은 것이 대부분이다. 호연은 점차 모티프를 줄이고 팔레트를 황톳빛과 초록, 회색톤으로 제한시킨 '단색조 회화'를 그려나갔는데, 제작 속도를 높이기 위한 자구책으로도 여겨진다.
꽤 절망적인 시기에 제작된 <두 오크 나무가 있는 풍경>은 그래서 더 풍성한 의미로 다가온다. 많은 작품을 제작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화가에게 척박한 땅, 풍파의 세월을 견뎌온 오크 고목은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호연은 이후 미술품 딜러와 경매인으로도 일하고 부동산 투자에도 손을 댔지만 1650년대 초 작품을 다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고, 6년 후에 엄청난 빚을 가족에게 남긴 채 사망한다.) 거기에선 오랜 세월을 살아낸 것이 갖게 되는 아우라, 쇠락의 여운이 아닌 연단된 생명의 호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두 그루가 함께 있으니, 시편의 말씀처럼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육중한 몸통과 굴곡진 가지를 가진 오크 나무는 힘과 인내,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다. 호연은 시련을 묵묵히 견뎌낸 나무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나도 이렇게 노년에 나만의 무늬와 단단함을 지닐 수 있다면! 회색 구름 가득한 하늘 어디에선가 내리쬐는 햇살이 나무를 빛나게 한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 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중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