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견디는 기쁨'
오랜 시간을 지나온 것이 풍기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다. 물건도, 인간도, 나무도. 그 형상과 피부에 차곡차곡 더해진 풍파와 감정과 이야기는 존재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인상 깊은 노인을 만나면 간혹 그분의 청년 모습을 떠올려볼 때가 있다. 수백 년을 자라온 보호수 앞에 서면, 시간을 되돌려 수많은 씨앗들 가운데 하나가 싹을 터 올린 순간을 상상해 본다. 여태껏 살아낸 생명은 수많은 겹과 함께 다가온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얀 판 호연이 그린 참나무 고목도 그런 긴 여운을 남긴 나무 중에 하나다.
나지막한 언덕에 선 두 그루의 참나무. 울퉁불퉁 기울어진 몸통은 여기저기 패어있고, 굴곡지게 뻗은 가지도 거의 부서져 있다. 그럼에도 수수하게 잎을 피워낸 고목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무 아래 두 남자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저기 봇짐을 메고 가는 이도 보인다. 뒤로 펼쳐진 낮은 평원에는 교회가 있는 작은 마을과 멀리 강이 흐른다. 잿빛 구름으로 뒤덮인 드넓은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가 눈에 띈다. 왼편 구름 사이로 비친 햇살이 나무와 언덕에서 반짝인다.
서양에서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17세기, 얀 판 호연(Jan van Goyen, 1596~1656)은 자국의 소박한 풍경을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네덜란드 초기 화가들 중에 하나다. 렘브란트(1606~1669)보다 십 년 앞서 레이덴에서 태어난 호연은 사실주의 풍경화를 구축한 근처 하를럼의 풍경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는 신과 영웅의 이야기가 삽입된 '고전주의 풍경화'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전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숭고한 교훈을 담아낸 니콜라 푸생(1594~1665)과 목가적인 이상향을 그린 클로드 로랭(1660~1682)의 풍경화에 열광했다. 그런데 스페인으로부터 막 독립한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볼품없는 저지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척박한 모레 언덕과 허름한 농가, 습지와 풍차,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화폭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네덜란드만의 허식 없는 풍경화는 그림의 수요자이자 관람자인 중산층 시민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조선업과 해운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는 전 세계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부유한 중산층이 두터웠고,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는 등 일찍이 자본주의 문화가 뿌리내렸다. 프로테스탄트 칼뱅교를 공식 종교로 삼았지만(1579) 종교와 사상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교육 수준이 높은 수공업자와 상인, 지식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17세기 네덜란드는 경제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이 꽃피는 황금시대를 누렸다.
귀족이 드물고 개신교 교회는 성화 주문을 꺼렸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섰다. 중산층이 구매할 수 있는 작은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기독교강요』(1566)에서 초상과 정물, 풍경 등 보이는 세계를 그리길 권고한 데다, 주문 시스템에서 벗어난 화가들은 더욱 자유롭게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시장이 형성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장르는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수준 높은 그림들을 여염집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17세기 네덜란드는 그래서 미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좌표로 여겨진다.
바다와 외세로부터 지켜낸 낮은 땅
호연은 1620년대 후반 허름한 농가와 굽이진 길, 작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모래 언덕 풍경(dunescape)을 반복해 그리며 그만의 단출한 조형 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그 가운데 <모래 언덕의 길>은 메마른 땅과 드넓은 하늘 사이에 키 작은 나무들과 농가가 슬쩍 보일뿐이다. 언덕에는 봇짐을 멘 사람과 말을 탄 여행자가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호연은 이처럼 낮은 지평선과 풍성한 구름, 빛과 대기 표현을 변주하며 구도를 단순화하고 색조도 제한해 나갔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초라한듯한 자국의 풍경화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연의 풍성함과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런 척박한 풍경에서 나는 왜 평온함을 느낄까?
나라 이름이 '낮은 땅'을 의미하는 네덜란드는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고 절반 이상이 해발 1m도 되지 않는다. 수백 년 동안 잦은 범람 속에서 저지대의 주민들은 제방을 쌓고 풍차로 물을 퍼내며 삶의 터전을 지켜왔다. 바닷물의 영향으로 저지대에서는 곡물도 나무도 풍성하게 자라지 못했다. 한 프랑스 여행자가 '이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개탄했지만, 그런 환경이 오히려 실리적이고 위기에 강한 네덜란드인을 만들어냈다. 특히 호연이 활동했던 시기에 진행된 대규모의 간척 사업은 바다를 면한 홀란트주의 풍광을 변화시켰다. 이에 속한 부유한 도시들, 암스테르담과 헤이그, 하를럼 주변은 도시민들이 구경하러 올만큼 광활한 모래 풍경으로 유명했다.
바다 말고 네덜란드를 위협했던 것이 있었다. 15세기경부터 17개의 자치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로 자리 잡은 플랑드르(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대) 지역이 16세기 초 (가톨릭)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에 편입된 것이다.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퍼져나가던 각 주가 스페인의 경제적 통제와 종교적 탄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저항 운동이 확대되며 북부 7개 주는 1581년 독립해 네덜란드 공화국을 설립했지만, 1609년까지 이어진 투쟁에서 남부는 결국 스페인령으로 남게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공화국의 시민들이 실질적인 행정 운영의 주체였다. 그림의 고객이기도 했던 이들에게 낯익은 저지대의 풍광은 바다와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개척한 땅에 대한 자부심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고요한 모래 언덕이나 소박한 농가 풍경은 복잡한 도시민의 일상과는 다른 시각적 여유와 마음의 휴식도 선사했다. 신실하고 검소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이들에게 피조물인 자연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섭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풍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하늘은 신이 구름을 수레 삼아 바람 날개로 다니는 궁전(시 104:3-4)이기도 했다. 모래 언덕에서도 은총을 느꼈던 이들은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사소한 것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줄 알았다.
“창조주의 선하심이 모든 모래 언덕 위에 나타난다” - 네덜란드 시인 콘스탄틴 호이겐스(1596~1687)
참나무 고목, 삶을 견디는 기쁨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적인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자연(현상)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과 인생의 교훈을 전달하는 문학적, 시각적 전통이 대중화되었다. 그래서 대표 그림 <두 그루의 참나무가 있는 풍경>에서 교훈을 찾아내려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쇠락한 나무는 생의 일시성을 전달하고, 한가로운 두 인물은 나태함을, 봇짐을 메고 떠나는 인물은 저기 마을의 교회, 즉 영원한 도성으로 향하는 순례자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지만, 호연의 그림 앞에서 교훈은 흐릿해진다. 삼백 년쯤 후에 반 고흐가 "호연처럼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라 말하며 그를 칭송했듯이, 소박한 시골 풍경과 일상은 그 자체로 휴식과 평온을 전한다. 무엇보다 풍경의 주인공인 참나무 고목은 풍파의 흔적과 개성적인 모양새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모레 언덕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나무는 지속된 범람과 풍광의 변화를 지켜보며 네덜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온몸으로 맞았을 것이다. 이곳을 지난 수많은 사람들은 그림처럼 나무 아래서 잠시 쉬면서 머물렀을 터이고.
호연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참나무는 단단하고 쓰임새가 많아 당시 네덜란드의 시골과 간척지에 널리 심겼다. 건축과 가구는 물론 선박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화가들은 참나무 패널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호연은 <참나무 고목이 있는 풍경>처럼 힘겹게 자라는 극적인 모양새의 고목을 더 즐겨 그렸다. 쓰러질듯한 농가는 이곳에 함께 터를 이룬 사람들의 삶도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낸다.
대표 작품과 같은 해에 제작된 <무지개가 있는 풍경>에서도 참나무 무리가 주인공처럼 서 있다. 기울어져 있지만 거친 땅에서 제법 잎을 피워냈다. 여기서는 농가의 가족, 들판을 가로지르는 여행자와 개, 말을 탄 신사와 수행자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구름의 자취와 사람들의 휘날리는 옷자락, 나부끼는 나뭇잎에서 거센 바람이 느껴진다. 하지만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깃든 곳에 희미한 무지개는 폭풍이 지나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구약의 대홍수 이후 노아에게 보여준 하느님의 언약처럼, 무지개는 희망과 재생을 암시한다. 여기서도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무와 모래 언덕을 비춘다. 헤르만 헤세의 시처럼 하늘은 햇빛과 악천후라는 두 개의 얼굴로 생명을 성장시킨다.
레이덴에서 1632년경 더 큰 도시 헤이그로 이주해 제법 알려졌던 화가 호연도 시대의 욕망에 휩싸이며 호된 시련을 겪었다. 부유해진 사람들이 그림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입된 사치품으로 은은하게 집을 꾸미고, 넘치는 현금은 간척 사업이나 증권 시장으로 흘러들어 갔던 시대였다. 터키에서 수입된 진귀한 꽃 튤립에 대한 열광으로 심지어 피지도 않은 튤립 구근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수많은 시민이 그랬듯이 호연도 이 이 열풍에 올라탔고, 집 한 채 가격까지 올라갔던 가격이 급락한 튤립 파동(1637)으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호연은 부동산 투기와 미술품 거래에도 손을 댔다. 물론 열심히 그림을 그려 팔아야 했다. 그가 남긴 1200여 점의 유화는 작은 크기에 비슷한 모티프를 반복, 변주한 풍경화가 많다. 호연은 모티프를 줄이고 팔레트를 황토나 초록, 회색톤으로 제한해 느슨한 붓질로 묽게 칠하는 '단색조 회화(tonal painting)'를 발전시켰다. 정물화에서도 나타난 이 경향은 유행의 변화와 함께 재료비 절감과 제작 속도를 높이기 위한 자구책으로도 여겨진다.
꽤 절망적인 시기에 제작된 대표작 <두 그루의 참나무가 있는 풍경>은 그래서 더 풍성한 의미로 다가온다. 많은 작품을 제작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화가에게 척박한 땅, 풍파의 세월을 견뎌온 참나무 고목은 더 특별하게 보였을 것이다. (호연은 당대 카렐 판 만더가 쓴 화가들의 전기(1641)에도 소개될 만큼 명성을 누렸지만, 빚에 허덕이다가 1650년대 초 작품을 다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고, 6년 후에 엄청난 빚을 가족에게 남긴 채 사망한다.) 거기에선 오랜 세월을 살아낸 것이 갖게 되는 아우라, 즉 쇠락의 여운을 넘어선 연단된 생명의 호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두 그루가 함께 있으니, 시편의 말씀처럼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단단한 재질에 육중한 몸통, 긴 수명을 자랑하는 참나무는 강인함과 인내, 지혜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다. 호연이 시련을 묵묵히 견뎌낸 이 나무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나도 이렇게 노년에 나만의 무늬와 단단함을 지닐 수 있다면! 잔뜩 흐린 하늘 어디에선가 내리쬐는 햇살이 나무를 따듯하게 감싼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 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중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