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과 나무의 이중주가 있는 낙원
삶에서나 그림에서나 완벽하고 이상적인 것보다 불완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에 끌린다. 그래서 풍경화의 교본이자 '그림 같은' 풍경으로 사랑받았던 클로드 로랭을 이제야 소개하는지도 모르겠다. 컨스터블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풍경화가'였고, 터너에겐 기부한 작품이 함께 전시되길 간절히 바란 화가였다.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들이 소박한 저지대의 풍경화로 집을 장식했다면, 로마를 넘어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이상적이고 목가적인 클로드의 풍경화를 향유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흐드러진 나무의 섬세한 잎과 그것을 비추는 아련한 빛은 보는 이를 계속 그곳에 머물게 한다.
멀리 석조 건물이 보이는 전원의 풍경은 늦은 오후의 햇살로 물들어 있다. 전경의 풀과 꽃들이 반짝이고, 듬성듬성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은 황금빛에서 갈빛, 진초록까지 다채롭다. 근처 그늘과 개울에 소들이 거닐고, 저기 목동이 홀로 한가롭게 앉아 있다. 클로드의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작은 풍경화는 그가 자주 스케치하러 나갔던 로마 외곽의 캄파냐를 배경으로 한다. 현존하는 이 건물은 당시 중세 요새를 개조한 크레센차 가문의 별장으로 원래는 높은 바위산 위에 자리한다. 클로드는 개울이 있는 풍요로운 골짜기 너머에 별장을 위치시켜 목동이 쉬어가는 시적인 풍경을 창조했다.
프랑스 상파뉴 태생의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4/5~1682)은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풍경화가다. 12살경 부모님을 여읜 소년은 이탈리아로 향해 로마와 나폴리 등지에서 풍경화가의 도제로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클로드는 로마에서 1620년대 후반 독립해 전원에서 목자들이 소들과 한가롭게 어우러져 지내는 목가적인 풍경화(pastrol landscape)와 해안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로마에서 그는 역시 프랑스 출신인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과 교류하며, 점차 풍경에 신화와 성경 등 역사화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클로드는 고대 유적이 남아있는 로마 캄파냐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것을 즐겼다. 자유자재의 필치로 평생 지속한 드로잉은 1300여 점에 이르는데, 이런 열정적인 자연 연구는 당시로서는 드문 것이었다. 1638년의 드로잉 <참나무>는 그의 나무 습작 중에서도 눈에 띈다. 담쟁이덩굴이 땅에서부터 뿌리가 드러난 나무의 육중한 줄기를 타고 올라 가지까지 뻗어있다. 그늘 속의 참나무는 빛을 머금은 후경의 나무들과 대조되어 야생의 강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이런 드로잉을 재료로 클로드는 작업실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풍경을 창조해 나갔다.
클로드는 노을빛으로 물든 항구 풍경(1639)에 제목처럼 자연을 연구하는 화가를 등장시켰다. 항구는 분주하고 옆에 담소를 나누는 두 신사도 있지만, 그는 스케치하는데 몰두해 있다. 클로드는 오른편 요새 같은 건물과 유사한 지중해 연안의 팔로성 드로잉을 여러 점 남겼으니, 저 화가는 클로드일 수 있지만 그가 바라본 풍경은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풍경의 중심에는 풍성하게 잎을 펼쳐낸 키 큰 나무가 주인공처럼 서있다. 멀리 석양의 햇살을 흠뻑 머금은 나무는 연두와 초록, 황톳빛 광채를 내뿜고 있다.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사랑했던 클로드는 빛의 효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동시대 화가이자 전기작가에 따르면 클로드는 종종 새벽과 황혼 녘에 들판에 누워 풍경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일출의 금빛 광선과 날씨에 따라 드러나는 은빛 대기, 일몰의 붉은 노을과 어둠이 내려앉기까지, 그 색채와 분위기는 매번 달랐다. 클로드는 오랫동안 풍경을 구상하며 현장에서 색을 섞었고, 로마 작업실로 와서 그 색을 자연스럽게 칠했다고 한다. 또한 얇은 물감층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투명하고 반짝이는 빛의 효과를 구현했다. 지평선에서 퍼져나가는 햇살과 자연이 빚어내는 효과는 후원자들을 매혹했고, 이후 터너와 컨스터블을 비롯해 인상파 화가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
<목가적 풍경: 로마 캄파냐>는 클로드 풍경화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풍성한 나무와 석조 건물(혹은 고대의 폐허)이 화면의 양가를 감싸는 구성에, 그늘진 전경에는 목동과 가축(혹은 신화나 성경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중간에는 이처럼 햇살이 깃든 굽이굽이 강이나 바다가 위치해 확 트인 뷰를 선사하는데, 겹겹이 위치한 언덕과 산이 시선을 아주 멀리까지 이끈다. 광대하고 깊은 공간,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태고의 감각은 작은 인물을 통해 더 강조된다. 층층이 조화롭게 구성된 풍경과 잔잔한 햇살은 충만한 고요와 평온의 감각을 전달한다. 목동의 피리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
<일출>에서는 목동들이 소와 염소를 데리고 개울을 건넌다. 저 멀리 떠오르는 해는 너른 평야와 언덕을 밝게 비추고, 흐드러진 나무들이 전경에 그늘을 드리운다. 지상의 낙원과도 같은 목가적인 풍경은 당대인들에게 아르카디아(Arcadia)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스 중부의 고립된 초원 지대인 아르카디아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bc 70~bc 19)가 전원시의 무대로 삼으면서 축복과 풍요의 낙원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목동들은 가축을 돌보며 인생과 사랑을 노래한다.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우애와 사랑을 나누며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행복을 누린다. 고전 고대가 재발견된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목동의 삶이 이상적으로 여겨지면서, 시인과 화가들은 점차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630년대 후반 로마 최고의 풍경화가로 성장한 클로드는 로마의 성직자와 지식인은 물론 유럽의 왕족과 귀족까지 후원자가 확대되었다. 이들의 세계는 구교와 신교로 유럽을 양분한 30년 전쟁(1618~48)과 전염병의 창궐로 참화와 불안이 지속된 시기였다. 로마 가톨릭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시 정비와 미술품 제작에 몰두했고, 부유한 귀족들이 차지한 종교계는 계급 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해 클로드의 후원자는 권력과 명예, 욕망으로 인한 불안과 긴장 속에 살았던 상류층이었다. 특히 로마의 상류층은 캄파뉴 지역에 별장을 짓고 고대 로마인처럼 전원생활의 이상을 누리고자 했다. 고전 고대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혼란스러운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의 풍경을 향유하기 원했고, 질서와 조화, 균형의 세계를 갈망했다.
대표 작품인 <라 크레센차 풍경>은 그런 평온과 고요를 갈망했던 어느 날 내 맘속에 들어왔다. 다른 작품에 비해 크기가 작지만, 저기 보일 듯 말 듯 한가롭게 앉아 있는 목동처럼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다. 모든 시름과 걱정과 문제에서 벗어나, 그의 눈을 통해 풍요로운 자연을 누리는 가축을 바라본다. 햇살의 세례를 받은 풀꽃들과 다채로운 색조의 나무와 잎사귀들을 바라본다. 클로드는 특히 나뭇잎을 그릴 때 섬세하고 빠른 붓질을 위해 뜨거운 물에 손을 한참 담근 후에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르카디아 같은 낙원에도 물론 좌절과 외로움과 죽음이 존재하지만, 목동(우리)은 자연을 관조하고 공생하며 힘을 얻는다. 컨스터블의 말처럼 클로드의 풍경화는 "모든 것이 편안함과 휴식이며, 마음의 고요한 햇살이다."
후원자들의 권력과 재력만큼 클로드의 풍경화는 점차 웅장해졌고, 신화나 성경의 이야기가 삽입되며 재미와 교훈이 더해졌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풍경>이 보여주듯이, 보통 목가적인 풍경 한편에 작은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성가족은 천사의 지시에 따라 헤롯왕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향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피난은 척박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지만, 로랭은 관람자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 속에 그들을 위치시켰다. 노을빛으로 황홀한 풍경을 유영하다가 성가족을 만나고, 굽이굽이 길을 따라 이들의 여정을 헤아려보게 된다.
로마에서 프랑스 출신인 클로드와 푸생은 '고전주의 풍경화'의 전성기를 주도하며 저급한 장르로 여겨졌던 풍경화의 위상을 높였다. 클로드는 다른 화가들의 위조를 막기 위해 '진실의 책(Liber Veritatis)'이라 칭한 작품 드로잉 도록을 관리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17세기 후반부터 그랜드 투어로 이곳에 온 영국의 귀족들과 부유층 자제들은 '로마적인' 클로드의 풍경화에 열광해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돌아갔다. 결국 클로드의 풍경화는 산업화로 급변했던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살고 싶었던 부유층은 소유지를 로랭의 그림처럼 조성하면서 '풍경식 정원'이 발전했다. 픽처레스크(picturesque) 미학은 18세기 후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스며들어 그림 같은 풍경을 찾아 떠나는 국내 여행이 유행했고, 덩달아 픽처레스크 사냥꾼이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클로드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풍경을 보길 원했던 여행자들은 회색톤의 '클로드 유리'를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클로드의 풍경화를 교본으로 삼았던 영국의 화가들과 대중은 노을빛에 물든 갈색조의 나무가 세련되다고 여겼다. 시간을 초월한 이상향을 향유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렇게 대중화되었다.
우리들의 마음엔 아주 먼 조상이 살았던, 하지만 잃어버린 고향과 낙원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아르카디아, 유토피아, 무릉도원과 극락까지,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곳에는 풍요로운 자연, 물론 초목과 빛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클로드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들판에 누워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묘한 노을빛의 드라마로 물들어가는 자연의 극장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낙원과 평온을 발견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