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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용담이 핀 쉬아호르너>

: 어두운 땅에서 솟아오르는 밝은 존재

by 권연희


제1차 세계대전은 많은 미술가들에게도 상흔을 남겼다. 전장에서 쓰러진 청년들도 있었고, 운 좋게 살아 돌아와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내야 했다. 비현실적인 현실을 경험한 미술가들은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언어를 쏟아냈다. 그 가운데 독일의 키르히너는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극심한 신경 쇠약으로 전쟁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스위스 알프스 산악에 정착해 뭉크처럼 자연 속에서 차차 회복되며 활기를 되찾았다. 안식처이자 영감의 원천이 된 알프스 풍경은 키르히너를 통해 가장 화사한 옷을 걸치고 생기 가득한 에너지를 품게 되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용담이 핀 쉬아호르너>, 1925년, 캔버스에 유채, 120 x 90.1cm, 버펄로 미술관


알록달록한 산속 풍경은 금세 보는 이의 마음을 밝힌다. 전경 풀밭에는 분홍과 보라의 둥근 호를 따라 알프스의 꽃인 짙푸른 용담이 피어있다. 그 뒤로 뾰족뾰족한 전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고, 멀리 보라와 파란색의 쉬아호르너 산봉우리가 보인다. 몽환적인 분홍빛 하늘 아래 펼쳐진 산악 풍경은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산자락에 꽃들이 입을 벌려 노래하고,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들썩이고, 산봉우리는 구름과 인사를 나눈다. 자연의 흥겨운 몸짓과 합창이 들리는 풍경은 화가가 산속에서 느낀 기쁨과 생기와 에너지를 전한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가을 나무>, 1906년경, 보드에 유채, 70.8 x 49.8cm, 노톤 사이먼 미술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중요한 화가다. 아샤펜부르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은 주변을 관찰하고 그리는 것을 즐겼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키르히너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의 건축학도가 되었지만, 미술 과목을 수강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결국 그는 미술에 열정적인 과동료들과 1905년 '다리파(Die Brücke)'를 결성한다. 이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서 건너가는 존재를 은유하는 '다리'처럼, 전통과는 다른 현대성을 담아낸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반 고흐나 에드바르 뭉크에 영향을 받아 내면의 감정과 충동을 직접적이고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특히 단순하고 투박한 표현과 흑백 대비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목판화를 즐겨 작업했다. 초기작 <가을 나무>가 보여주듯이, 유화의 언어도 대담한 색채와 두껍고 거친 붓질이 특징적이다.


다리파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삶과 예술의 조화를 추구했다. 전시회를 다니고 술집과 카페에서 흥청망청하며 자유연애를 즐겼다. 분주한 거리와 서커스, 카바레 풍경 등도 다루었지만, 이들의 중심 주제는 벌거벗은 몸이었다. 보헤미안의 아지트인 공동의 작업실에서 다리파 화가들은 자유로운 포즈의 모델들을 재빠르게 포착하며 섹슈얼리티를 탐구했다. 또한 숲이나 호수로 여행을 떠나 나체로 자연을 즐기며 서로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들의 화면은 초록과 흙빛 색조로 가득하고, 인물은 나무와 수풀의 각진 모습을 반영하며 자연의 일부가 된다. 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을 지향했던 나체주의와 자연으로의 회귀 운동의 유행은 20세기 전후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민속학 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미술도 원시적인 삶을 갈망했던 다리파에게 영감을 더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1915년, 캔버스에 유채, 69 x 61cm, 앨렌 추모 미술관, 오하이오

1911년 키르히너는 베를린으로 향한다. 인구 이백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의 활력과 퇴폐가 도사리는 환경에서 그의 그림도 변한다. 분주한 거리의 속도와 에너지에 매혹된 키르히너는 11점의 '베를린 거리 풍경'을 그려나갔다. 급속한 원근법으로 묘사된 공간에 길쭉하고 뾰족한 형상과 (전기 조명의) 인공적인 강렬한 색채, 신경질적인 붓질이 특징적인 거리 풍경은 가장 독창적이고 키르히너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흥미롭게도 연작의 실제 주인공은 매춘부들이다. 도시의 화려함과 소외감을 상징하는 매춘부는 성까지도 상품화되는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베를린에서 키르히너는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에르나 실링을 만난다. 한편 8년간 유지된 우정의 공동체 다리파는 각자의 개성이 강해지면서 1913년 와해된다. 전운이 감도는 도시에서 불안을 느낀 키르히너는 더욱 과도한 음주에 빠져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35세의 화가도 곧 입대했다. 보헤미안 키르히너에게 군대의 억압적인 환경은 지옥 같았고, 두 달 만에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그는 제대와 요양 명령을 받는다. 베를린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에 그린 자화상(1915)에서 키르히너는 여전히 군복차림이다. 무심하게 담배를 문 채 두 팔을 들고 있는데, 오른손이 잘려 있다. 뒤쪽에 캔버스와 모델이 있지만 군인으로서는 작업하기 어려운 상태와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전쟁터를 벗어났지만 키르히너는 여전히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으로 고통받았고, 때때로 손이 마비되기도 했다. 전쟁이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개성을 앗아갈 뻔했던 것이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달빛에 겨울 풍경>, 1919년, 캔버스에 유채, 120.7 x 120.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불안 발작으로 요양원을 전전하던 키르히너는 전쟁 중인 1917년 스위스 다보스 근교의 산으로 떠났다. 산악 생활이 건강과 작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곧 이곳에 정착한다. 키르히너의 캔버스는 이제 알프스 풍경과 그 속에서 공존하는 인간과 동물들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 <달빛의 겨울 풍경>은 알프스에 드리운 달빛이 자아내는 독특한 색조의 풍경화다. 신비로운 오로라처럼 달빛은 노랑과 빨강, 보라로 하늘을 물들이고, 구름은 폭죽처럼 터지며 흘러간다. 서늘한 파랑 색조의 눈 덮인 산은 쨍한 분홍색 나무들과 대비된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겨울 달밤의 '미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은 화가가 느낀 감정과 상상을 반영한다. 화가의 기억 속 정경은 무대 조명 같은 달빛을 통해 더욱 환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이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조국 독일은 붕괴 직전이었고, 키르히너도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알프스 풍경을 자신의 '신경과 피'로 그렸다고 말했듯이, 키르히너는 온 감각과 에너지를 끌어모아 붓을 들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여름의 세르티갈 계곡>, 1924년, 캔버스에 유채, 120 x 90cm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가을의 세르티갈 계곡>, 1925년, 캔버스에 유채, 136 x 200cm, 키르히너 미술관, 스위스 다보스


산악으로 둘러싸인 자연과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 속에서 키르히너는 차차 원기를 회복했고, 1922년경 약물 중독에서 벗어났다. 화가의 강한 의지와 에르나의 보살핌도 한몫했다. 건강이 호전되자 키르히너는 더욱 왕성하게 작업했고, 그림도 밝고 안정적으로 변했다. 미술계는 물론 이웃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1924년 설립된 스위스 표현주의 그룹 ‘로트 블라흐'(빨갛고 파란)의 청년들과 정기적으로 함께 작업했다. 유일하게 축음기가 있는 자신의 집에 가끔 이웃들을 초대해 댄스파티를 열기도 했다.


이 시기 키르히너가 계절 따라 그린 세르티갈 계곡을 살펴보자. 세로형의 여름 풍경은 초록이 무성하다. 골짜기 길을 따라 마차를 탄 농부들이 산속으로 오르고, 옆에 계곡은 아래로 흐른다. 산자락에 핀 분홍과 노랑꽃들, 파랑과 주황의 장식이 더해진 나무까지, 같은 해 그린 대표작품 <용담이 핀 쉬아호르너>처럼 자연의 활기와 에너지로 충만하다. 부드러워졌지만 역동적인 붓질, 무엇보다 밝은 원색이 즉각 마음을 움직인다. 노랑과 파랑, 빨강과 주황, 녹색과 보라가 주를 이루는 키르히너의 팔레트는 괴테가 도출한 색상환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변주된 색들과 보색 대비를 통해 자연은 원초적이고 해방적인 힘을 갖는다. 스스로를 '색채 인간(Farbenmensch)'이라 불렀던 키르히너에게 "색은 삶의 기쁨"이었다.


가로형의 가을 풍경은 테라스에서 바라본 드넓은 경관을 보여준다. 테라스에 선 조각상과 산자락의 둥근 길을 따라 자리한 집들, 멀리 푸른 산과 대조되는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하다. 군데군데 직물처럼 줄지어 배열된 붓놀림 때문에 이 시기 풍경화는 '태피스트리 양식'으로 불린다. 당시 키르히너가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하고 지역 장인이 제작하는 협업이 그림 작업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추상화되는 동시에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신양식(new style)'로 변화되지만, 색채는 말년까지 변함없이 삶의 활력과 사랑을 담았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전나무>, 1918년, 목판화에 채색/ 19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0 x 69cm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빌드보텐 숲 속>, 1927년, 캔버스에 유채, 135.3 x 99.7cm/ <숲 속>, 1937년, 178 x 135cm


1925년 키르히너는 9년 만에 독일로 향했다.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된 독일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키르히너는 건강이 악화되고 반려자인 에르나의 우울증까지 더해져 힘든 시기를 보냈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하고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공공미술관에서 '퇴폐적인' 미술을 퇴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표현주의 작품들이 독일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파괴하는 본보기로 여겨졌고, 키르히너의 작품 600여 점도 압수되어 파괴되거나 해외로 팔려나갔다. 키르히너는 우울증과 수면 장애가 심해져 다시 약물에 의존하게 된다.


키르히너는 절망과 희망, 불안과 확신 사이를 오가면서도 계속해서 알프스의 자연을 찬미했다. 국제적으로 알려지던 1937년 나치가 개최한 '퇴폐 미술전'에 키르히너의 작품 32점도 전시되었다. 곧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퇴출되었지만, 그는 차차 건강을 회복하며 활력을 되찾았다. 그 해 독일의 컬렉터인 루이제 쉬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키르히너는 새로운 그림을 소개하며 자신을 "어두운 땅에서 밝은 존재로 상승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흙을 뚫고 나와 빛을 향해 솟아오르는 풀과 나무처럼.


다보스로 요양 왔을 때부터 키르히너는 매일 마주하는 나무들을 종종 그렸다. 주로 알프스 고지에 흔한 전나무가 주인공인데, 뜨거운 여름이나 눈 덮인 겨울이나 한결같은 자태로 높이 솟아 있다. 초기의 나무는 화가의 불안을 반영하듯 왜곡되고 어둡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무는 햇살 속에서 생기와 환희를 내뿜는다. 편지에서 키르히너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우울하지만 위대한 화가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목숨을 다해 작업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꾸준히 일기를 썼고 미술계 인사들에게 편지로 작품을 알리며 가명으로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을 게재하기도 했다. 평생 유화와 드로잉뿐만 아니라 판화, 파스텔과 수채화에서 조각과 가구, 수공예품과 직물까지 끊임없이 다양한 매체에 도전하여 '독일의 피카소'로 불렸다.


열망하는 것과 실제 상태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 침공하고 합병된 후 키르히너의 정신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독일군들이 근처 오스트리아에서 다보스 산골까지 찾아와 자신을 잡아가고 작품을 또 파괴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리자 그는 자기 손으로 하나둘 작품을 부숴버렸다. 계획했던 에르나와의 결혼식도 돌연 취소하고 동반 자살을 제안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58세의 화가는 반 고흐의 길을 따라갔다. 6월 어느 날 그는 빌트보덴 집에서 들판으로 달려 나가 가슴에 총을 쏘았다.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다보스에 설립된 키르히너 미술관에서 가장 찬란한 알프스 풍경화들을 만날 수 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 <세르티그 계곡>, 1937년 캔버스에 유채, 120 x 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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