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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게 자란 딸내미 Dec 28. 2022

지각인데 마음이 편합니다

카톡창을 열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한 친구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버스를 탔다고 답장을 보낸 후, 버스 좌석에 몸을 구긴 채 눈 쌓인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20분 지각이었다. 하지만 이 편안한 마음은 뭘까.

나는 낯설게 피어오르는 이 마음이 의문스러웠다.

 



3일 전.

 

나는 조금 긴 낮잠에서 일어나, 오후 느지막이 카톡을 켰다. 평소보다 많은 카톡이 쌓여있었고, 대부분 생일 축하 메시지였다.


그렇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모처럼 생일 기념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내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한 그룹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과는 약 4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다들 착하고 얘기가 잘 통해서, 거의 분기에 한 번꼴로 만남을 가졌다. 정말 오랜 친구들과도 그 정도로 자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나는 이들을 이미 절친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거래처 직원에게도 생일 선물을 보낼 정도로 선물하기를 좋아하는 나이니, 친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들의 생일마다 카카오 선물하기로 선물을 보냈다. 고가의 선물은 아니었지만 나름 성의 있는 선물들이었다.


그런데 내 생일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도 아무도 내게 생일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단톡방에 다 같이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내준 것, 그리고 곧 만날 것을 생각하니 신난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사실 A는 매년 내 선물을 받기만 하고 답례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도 그렇다면 나도 이제 더는 선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년 내 생일 선물을 챙겨줬던 B와 C도 답이 없는 것은 의아했다.


그때, B로부터 카톡이 왔다.


"언니, 내가 떠놓은 가방 중 하나를 생일 선물로 주려는데, 어떤 게 좋아? 골라봐."

"나 가방 집에 넘쳐 ㅋㅋ 싫으면 새로 하나 떠줄게."


같이 보낸 사진 속에는 방바닥에 놓인 뜨개 가방 두 개가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뜨개질은 그녀의 취미이다. 워낙 금손이라 평소에도 가방을 몇 번 떠준 적이 있었고, 내가 돈을 주고 사겠노라고 해도 한사코 말리던 그녀였다. 나는 줄곧 그녀의 가방이 예쁘다고 생각해 왔다. 실값과 노동력이 비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뜬 것도 아니고, 남는 걸 준다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그 선물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챙겨준 것이고 수제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돌려 말했다.


"나 생일선물 안 챙겨줘도 돼~ 사실 A는 나한테 준 적이 없고, C는 올해는 안주더라구 (아직 오늘이 지나진 않았지만)ㅋㅋ 아무래도 생일 선물 챙기는 건 내 만족인 것 같아. 너한테 부담 준 것 같아서 미안하네 ㅠㅠ"


다소 저자세인 나에게 B는 괜찮다며, 이미 떠놓은 것이니 이걸 마지막으로 받고 끝내라는 인심 좋은 소리를 했다. 나는 다시 좋게 거절하고, 나중에 차라리 제값 주고 사겠다고 말하며 카톡을 마무리했다.


지난 그녀의 생일에 나는 록시땅 필로우미스트를 선물했었다. 비싼 것도, 수제도 아니었지만 그걸 고르는 내 마음은 무척 설레고 즐거웠다. 그녀에게는 이런 설렘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도 선물은 해야겠고, 집에 있는 가방들이 눈에 띄었겠지. 그 마음의 격차를 깨닫게 되자, 무척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인 건지, C는 저녁쯤에 내게 선물을 보내왔다. 참 고마웠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진이 빠진 나는, 그 친구들과 나의 우정에 관하여 다소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년 내가 챙겨주는 선물을 받기만 하는 A.

집에 남는 수제 가방을 선물로 주겠다는 B.

생일이 한나절이 지나서야 선물을 보내주는 C.


선물에 집착하는 내가 속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들과 나는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흘러, 약속날.


우리 집에서 A의 집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다. 제시간에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나는 느긋하게 눈을 뜨고, 준비하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단톡방에 미안하다며 'ㅠㅠ'를 치는 내 마음은 한껏 평온했다.


평소에는 약속에 5분만 늦어도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왜 서두를 마음이 들지 않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좀 더 초조해하란 말야, 마음속의 누군가가 이랴 하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좀처럼 내 마음은 급해지지 않았다. 창밖의 눈 쌓인 풍경처럼, 무척 고요하고 차가웠다.


결국 나는 30분가량을 지각했다.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 같이 친구 집 근처 맛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예쁜 카페도 다녀왔다.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모든 주제가 흥미로워 음료는 진작에 바닥을 보이는데도, 목이 아플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헤어지기 아쉬우니 저녁까지 같이 놀고 가자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를 나왔다. 일찍 나오긴 했지만, 그녀들과 함께한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 그녀들과 크게 싸우거나 절교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실망도 기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녀들과 나 사이에는 딱 그날 지각에서 느낀 평온함 만큼의 거리감이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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