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의 몸을 평가할까

by 레인메이커



부끄러움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생각하다 보면,

결국 시선에 도달하게 된다.

몸은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아프거나 편안하다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

그 몸이 갑자기 '괜찮은 몸'이나 '부족한 몸'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은 대개 타인의 눈이 개입할 때인데,

이상한 것은 그 개입이 대부분 폭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조용하고, 반복적이고, 때로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기준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대부분의 기준은 누군가의 시선이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하면서 만들어진다.

날씬함이 좋은 것인지, 어떤 형태의 몸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잡지에서, 광고에서, 화면 속 인물들의 몸에서, 혹은 별 의미 없이 던져진 한마디에서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스며들었다. 충분히 오래 스며들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하나의 규칙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규칙은 정확히 누구의 것도 아닌데 모두의 것처럼 움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준은 생각보다 많은 장소에서 작동한다.
해변에서도, 수영장에서도, 탈의실에서도 몸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는 그곳에 심판이 있어서가 아니다.

심판은 없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심판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훈련받아왔다.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가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 행동들은 실제 위협이 아닌 학습된 반응에 가깝다.

그 장면을 조금 멀리서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신경 쓰느라 바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몸도 의식하는 동안,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그 시선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몸이 건강한지, 편안한지, 움직이기 좋은지 같은 질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종종 다른 종류의 질문이다.

이 몸이 괜찮아 보일까.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을까. 그 질문들이 반복될수록 몸은 점점 감각의 대상에서 멀어져, 관리되고 조율되어야 하는 어떤 이미지처럼 다뤄지기 시작한다.

몸이 원래 그런 존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서로의 시선 안에서 살아오다 보니,

몸도 그 시선의 문법을 익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문법이 너무 자연스러워진 나머지, 우리는 몸에 무언가를 걸치지 않으면 어쩐지 덜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옷은 몸을 가리는 물건이 아니라, 시선을 관리하는 장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