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논문 산을 바라보며

이거 다 읽으면... 논문 내는 거다?

by 웨지감자


논문을 읽는 것은 연구실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논문을 많이 읽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연구 때문인데, 현재 내가 도맡아서 하는 연구 주제는 우리 연구실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선배가 없다는 말이다. 반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시작했던 이 연구는 도저히 논문을 읽지 않고는 진행이 불가능했다. 그때부터 나는 강박적으로 논문을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논문을 읽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 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읽는다. 연구 초기에는 실험 설계를 위해서 논문을 읽되, 주로 method 위주의 발췌독을 했다.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method만 쏙 빨아먹고 등 뒤로 던져버리곤 했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때 던져버린 논문 중에서는 아직도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연구들도 많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지금, 실험 방법이 완전히 정착한 이제는 한 논문을 고르면 서론부터 고찰까지 빠짐없이 정독한다. 어떤 목적으로 연구를 설계했고, 그래서 나온 결론으로부터 어떤 의의를 끌어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결과의 해석이 관건이 되는 현시점에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결과를 분석하고 고찰을 썼는지 눈에 불을 켜고 보는 중이다.


그러다 보면 논문의 reference를 타고 가게 된다. 해석의 근거가 무엇인지, 주석을 타고 타고 가다 보면 한 논문을 다 읽은 뒤에는 추가로 읽어야 할 논문들이 평균 네다섯 개는 더 생겼다. 이 논문 리스트는 고이 컴퓨터에 다운로드하여 <연구 참고 자료> 폴더에 모셔놓았다.


이런 식으로 논문 읽기를 반복하다 보면 <연구 참고 자료> 폴더에 저장된 논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지금 세어 보니까 약 400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언젠가 다 읽을 수 있을지조차 잘 모르겠다.






하지만 "논문 산"이라는 표현 뒤에 숨은 진정한 이유는 내가 논문은 무조건 프린트해서 읽기 때문이다. 이 고도화된 디지털 사회에 종이 논문이라니! 하지만 연구 분야를 떠나면 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중 아날로그에 더 가까운 인간이다. 공부할 때도 무조건 프린트물에다가 필기하고 메모해야만 진정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논문도 각 잡고 읽을 시에는 무조건 인쇄해서 펜으로 메모하면서, 형광펜으로 주요 문장들이나 키워드를 표시해 가면서 읽어야만 한다.


논문은 한번 읽어서 땡이 아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보이는 게 논문이다! 또한 우리의 기억이 유한한 까닭에 연구하다가 혼동이 생기면 예전에 읽었던 논문을 다시 뒤져서 읽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읽었던 논문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하나 둘씩 인쇄해 놓은 논문들이 점점 내 책상 위에서 산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동산 수준이지만 언제 남산만 하게 불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다 읽은 논문은 사물함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 부담스러운 두께로 쌓여있다. 몇 개 정리해야 하나 해서 들춰봤지만, 아무것도 버릴 수 없었다. 다 필요에 의해 수집된 논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책상을 논문들에 치여 남들보다 좁게 쓰고 있다. 연구실 동료들이 지나가면서 어째 산이 점점 높아진다면서 픽픽 웃고 가곤 했다.


그래도 좋다. 논문들아, 나를 부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줘. 그리고 이 논문 산을 다 읽으면 내 연구로 논문을 낼 수 있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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