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오면 머리만 쓸 줄 알았더니

어림없다, 단순노동부터 시작하거라

by 웨지감자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멋진 연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멀리서 보면 눈부신 성과들이 그저 멋져 보이기만 했는데 조금만 다가가 보면 눈물과 혼동의 대환장 파티다.


대학원에 진학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환상 중 하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 오로지 머리만 쓸 거라는 것이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코드를 짜고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우아한 모습을 상상했나 보지? 이런 가소로운 녀석. 현실 연구는 그렇게 고상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진학 전 인턴 때 맡아 진행하던 데이터 전처리 과제가 있었다.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데이터를 이쁘게 닦아놓는 작업이라고 해야 하나. 그걸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 눈을 반짝거리면서 했다고 해도 이제 이것만 계속하다 보니까 지겨워 죽겠다. 이건 뭐, 메인 연구도 아닌 단순노동인 것이 시간만 잔뜩 잡아먹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때때로 연구는 단순노동의 구덩이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다. 실험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노이즈가 많은 데이터를 반짝반짝하게 닦아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목적에 맞는 실험을 설계하려면 이것저것 바꿔가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생각보다 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에 있다. 돈이 많은 연구실이라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어떻게든 대학원생의 시간과 노동력을 줄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물을 머금고 열심히 해야 한다.


선배나 교수님은 나를 재촉하고, 나는 변명을 거듭하며 어떻게든 기한을 늘린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해 잠을 줄여가며 우당탕탕 일을 해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실수가 생겨서 더 돌아가게 되는 건 정말 슬픈 사실이다. (이 와중에 내가 이렇게 바쁜 게 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 때문이라는 게 정말 화나는 부분이다) 내가 이런 일을 몇 년이나 했다. 길어도 너무 길다.

물론 이제는 알고 있다. 단순노동도, 데이터 전처리도 전부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잘못되면 이후의 모든 일은 허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꼼꼼하게, 잘, 처음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무참히 깨져버린 연구에 대한 내 로망은 어떡한담. "아, 몸 그만 쓰고 머리 쓰고 싶다. 연구하고 싶다."라고 외치는 시기는 모든 대학원생이 한 번쯤은 거쳐 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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