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돌봄 “이다. 돌봄을 영어로 care라고 하며 그 단어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뜻은 “관심을 가지다.”이다.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잊지 않아야 할 것이 대상자에 대한 관심이다. 관심만큼만 보이고, 관심만큼만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결국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을 한 것이다.
돌봄의 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새로운 것이 보인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로 눈을 돌리는 “자기 돌봄”이다. 나조차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돌봄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작가님의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나를 돌보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했던 강연인데 그곳에서 작가님이 이런 문장을 전해주신다.
“힘들 때조차도 나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자기 돌봄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강의를 들으며 오래전 내가 보았던 하나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코로나로 인해 요양보호사들이 현장실습을 갈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영상으로 실습을 진행하던 그때 치매, 돌봄, 노인과 관련된 영상들이 교육원으로 내려왔고 그중에서 “고령화 시대, 부모 부양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제목으로 시청했던 다큐시선이다.
80세라는 나이로 치매진단을 받고 요양원에 입소한 어르신의 이야기 나온다.
“여기서 사니까 집보다 편하고 좋아. 왜냐하면 집에서는 혼자서 그냥 우두커니 있지만 여기는 옆에 사람도 있고, 음악도 있고, 신나게 흔들기도 하니까.”
“자식들이 보고 싶지는 않아요?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지. 전화로 목소리나 듣는 거지.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어르신은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시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법칙보다 더욱 진실하였기에 계절의 순리는 어김이 없다. 저 자연이 얼마나 좋아.”
이 어르신의 모습을 촬영을 하던 PD는 한 마디를 전한다.
“나름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재미를 찾으신 듯합니다.”
맞다. 요양원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신 분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자식과 함께 할 수 없는 아픔과 아쉬움을 뒤로한 마냥 행복하기만 한 즐거움은 아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딸과 이별이 아쉬워 멀어지는 딸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는 어르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 어르신을 통해 진정한 자기 돌봄의 모습을 보았다. 현실을 탓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나를 다독일 줄 아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다.
요양원에서 살게 된 이유들 속에서 감사를 찾고, 창밖으로 겨우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이 주는 감사를 새긴다.
이 어르신은 치매가 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영상 뒤편에 딸이 어르신의 과거 삶을 공개한다. 요양원에 와서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신나게 춤을 추는 엄마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리 엄마가 아닌 줄 알았어요. 내가 아는 엄마는 조용히 앉아 매일 책을 읽는 분이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춤을 추고 있으니 맞나 싶었거든요.”
어르신의 과거는 독서로 무장된 삶이었다. 지금은 비록 치매라는 병과 함께 하고 있어 기억력이 감소되고 있지만 건강할 때 암기했던 귀한 문장들은 고스란히 남아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던 것이다. 더불어 현재는 요양원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향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자기 돌봄을 한다.
어르신의 모습을 통해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를 바꾸는 것은 “결심”이 아니라 오직 “연습”이라는 것이다.
습관처럼 매일 해왔던 나의 행동과 생각들은 기억력이 상실되는 치매라는 병에게도 쉽게 침범당하지 않는다. 건강할 때 나를 잘 돌보아주던 습관은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자식을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다짐과 결심으로는 단 하루도 요양원에서 살아가기 힘들다. 노인이 되어 어디에 놓이든 그곳이 마치 천국처럼 즐기려면 오늘도 결심이 아닌 연습을 해야 한다.
나를 잘 돌보아 주는 연습이다. 내가 행복한 것을 찾아 하고, 내가 즐거운 것을 즐기며, 나에게 조금 더 친절과 배려를 베풀어주는 나에게 따뜻한 사람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