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깜짝 수다타임
제주에 온 이후로 육지에서는 잠자고 있던 나의 도전정신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울증세도 차츰 줄어들고 있다. 몇 주 전 병원에 갔을 때 처음 내원했을 때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인다는 말을 의사 선생님한테서 들었다. 아마 바쁘게 지내는 일상이 주는 텐션이 무기력과 우울을 조금은 낮춰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도전정신은 청년 나이 끄트머리에 해당되는 나이지만 염치 불고하고 청년지원사업에도 지원해 보고 프로그램에도 지원해 보고 경력은 없어도 자격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원하면서 발휘되고 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준비하는 과정의 즐거움을 서른여섯이 된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경쟁에 찌들었던 10대와 20대 시절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함께하는 즐거움과 안정감을 훨씬 많이 느끼고 배우고 있다.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 문화 예술 기획 프로그램에 참여해 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함께 활동하는 팀원 중 한 명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가 기억이 난다. 의견을 나눌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며 주저주저하고 쭈뼛거리던 모습이 부끄러움과 숫기 없음 보다는 겸손함과 정중함이 느껴졌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런 일본의 정서와 문화가 배어있는 듯했다. 얼마 전 여행으로 다녀온 일본의 느낌이 그녀에게서 묻어났다. 물론 그녀의 성격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태어나서 십 년 동안 자란 곳의 문화는 학습이 아닌,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일본 특유의 예의 바른 문화, 일본만의 정갈함이 참 좋았다. 만날수록 미소 짓게 하는 친구였다. 나보다 세 살 어리지만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가 보여준 정중함이 안전감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아직 싱글이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질적이지 않고 반가웠다. 그녀 또한 아이를 키우며 이런저런 일을 하고 지내는 나를 흥미롭게 보았고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고요하게 흐르는 맑은 강물 같다. 매우 정적인 그녀가 내 앞에서는 서서히 수다쟁이가 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쁘다. 내가 편해지고 있다는 신호니까 말이다. 그녀의 앞날이 참으로 기대된다. 그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대만에서 유학을 했으며 베트남에서 일을 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 문장에 벌써 4개국이 등장하는 그녀의 20대는 방구석에 처박혀 책이나 읽다가 방송작가가 되었던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참으로 용감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늘도 그녀가 청한 수다타임에 나는 흔쾌히 응했고 그녀가 유튜브로 오래전부터 봐왔던 고양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펐다는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제야 오늘 그녀의 눈이 퉁퉁 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키운다. 나는 강아지를 키운다. 비슷한 듯 다른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쌓여갈까. 사람 만나는 것만큼 즐겁고 재밌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책 한 권이 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서사 없는 사람이 없고 우여곡절 없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들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중에서 누군가와 오랜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기도 하고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시절인연이 되기도 한다. 그 인연들이 곧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다음에는 수제칵테일을 파는 바에 가기로 했다. 그녀가 사는 세상에 발을 들여 볼 생각에 아주 기대가 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