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그런 것이었다 : 32년 만의 깨달음
지난 주말,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창옥 교수님의 토크쇼를 우연히 틀었다. <손녀보다 철없는 질투의 화신 할머니>라는 사연이었다. 처음에는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가볍게 들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사연자(딸)가 친정엄마를 챙기지 않으면 삐지고 토라지고 질투를 하는 친정엄마에 대해 하소연하는 이야기였다. 사연자에게는 오빠가 있는데 친정엄마가 오빠에게도 질투를 하는지 패널이 물었다. 친정엄마는 오빠에게는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사연자 본인이 오빠에 대한 질투가 많다며 치킨 에피소드를 말했다. 자신이 몇 날 며칠을 치킨 먹자고 하면 졸라도 돈 없다고 안된다고 하면서 오빠가 치킨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시키라고 했다는 이야기, 친정엄마가 사연자에게 돈이 꼭 필요하다고 해서 보내주면 오빠한테 가있다는 이야기가 참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딸에게는 질투를 하고 아들에게는 무엇이든 해주는 아들 바라기 친정엄마의 모습이 참 익숙하다. 이 구조가 나의 원가족 구조와 딱 들어맞는다. 사연자의 친정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반박했다. 딸이 어려서부터 오빠만 해줬다고 지금까지도 자신을 들들 볶는다며 하소연했다. 사연자 입장에서는 같은 자식인데 친정엄마가 오빠만 챙겨주는 모습에 상처를 받아서 하는 소리인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친정엄마의 대답은 "너는 여자고 오빤 남자잖아."였다고 한다. 이것마저도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 친정엄마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시다고 한다. 오빠가 일곱 살, 사연자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는 스물네 살에 혼자가 되셨다고 한다. 사연이 나의 원가족 이야기와 비슷하다 못해 똑같아서 신기했고 더 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남편이 없던 우리 엄마도 그랬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오빠에게 가 있었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건 신경 쓰지 않았고 고등학생씩이나 되는 오빠는 차로 모셔다 드리고 모셔오고 개인기사 노릇을 했다. 도통 이해가지 않았다. 돌봄이 필요한 나에게는 독립과 홀로서기를 강조했고 독립과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하는 오빠에게는 돌봄과 과잉보호를 했다. 그래도 먹을 거 가지고 차별은 하지 않아 어렸을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난 나에게 엄마는 수시로 "너는 좋겠다. 남편 있어서."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고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고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새아버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새아버지가 생긴 이후로 그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는 마흔셋이나 먹은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화를 해서 상의하고 의논을 한다. 같은 자식인데 내가 왜 일곱 살이나 많은 성인 남자의 진로와 직업, 밥벌이, 그의 가족부양,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 그렇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있던 일이니까. 그게 나의 역할이었으니까. 이렇게 해야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연자와 친정엄마의 사연을 듣고 김창옥 교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가 돌을 깨는 일을 하시는 석공이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하셨던 일을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깨는 건 어려워서 못하고 옮기는 걸 했는데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고 한다. 고된 노동에 지쳐갈 때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나랑 나이가 비슷하지만 상황이 어려웠을 그 남자. 자식이 여섯 명 있고 귀는 안 들리는 그 남자를 떠올리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매일 집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던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술이 아버지의 고된 하루에 유일한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아, 그 남자가 이래서 그랬구나.' 이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한다.
김창옥 교수님은 사연자에게 친정엄마 입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다. '나 너무 어린 나이인 열일곱에 아이를 낳았어. 그리고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내 남편이 사라졌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남편이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들의 마음의 대부분은 큰 아들이 반은 내 남편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남편의 빈자리 아들로 채우려 하는 것이 남편을 먼저 보낸 여자들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연자와 나는 억울하다. 남편은 오빠가 하고 남편역할은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걸까. 나와 타인을 인지하는 영역이 구분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은 나를 대하는 영역과 구분이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자신을 대하듯 딸인 사연자에게 행동했을 거라는 게 교수님의 답이었다. 친정엄마 입장에서는 '엄마가 남편이 있냐 뭐가 있냐 엄마는 너밖에 없어. 엄마가 애처럼 해도 너라도 받아줘.'라는 마음이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맞다. 그랬다. 엄마가 나에게 서슴없이 한 말이 또 있는데, "아빠 없는 것보다 남편 없는 게 더 힘든 거야."라고 어렸을 때부터 세뇌 아닌 세뇌를 당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엄마가 아빠를 잃은 서른 셋을 지나 서른 여섯이 된 이제는 엄마를 이해하지만 나도 자꾸만 마음의 연골이 자꾸 닳아 나를 갉아먹는 그런 이야기는 그만 듣고 싶다. 그래도 새아버지가 오신 이후로는 많이 줄었지만 오빠에 대한 집착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엄마가 평생 놓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달 전 마흔셋의 오빠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 인턴 나부랭이가 하는 일부터 하고 있다. 그로 인해 생긴 오빠의 가정에 생긴 생활비 구멍 충당은 엄마가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엄마는 재산 명의도 오빠랑만 공동명의를 했다. 그렇다. 오빠는 엄마의 남편이었다. 나는 아직 사회적으로 기반이 잡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외 됐다. 그 생각만 하면 괘씸하긴 하다. 열심히 아닌 척하고 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서운하다. 하지만 김창옥 교수님께서 이렇게 생각하란다. '아유, 우리 엄마 아버지한테 돈준거라고 생각할게.'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나니 괘씸함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김창옥 교수님은 두 모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그때 그 여자(친정엄마), 그때 나랑 나이가 비슷한 어린 여성(딸)으로 바라보는 게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말이다. 나는 불가능하겠지만 두 분에게는 가능했으면 좋겠다. "만약에 돌아가신 아빠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면 오빠보다 사연자에게 더 미안하다고 할 거예요. 내가 할 몫을 네가 다하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일찍 가서 미안하다고 하실 거예요. 틀림없이."라는 김창옥 교수님의 마지막 말에 나는 뭉클했다. 진짜로 아빠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아빠가 보고 싶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뚜렷이 생겼다. 그동안 아빠 역할을 해왔던 나. 지금도 하고 있는 나. 새아버지가 생기면서 남편역할은 많이 줄었지만 엄마는 오빠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와 상의를 한다. 언제쯤이면 해방 될 수 있을까. 오빠가 1인분을 제대로 하면 그게 가능할까.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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