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항상 어렵고 힘들다
작년 봄에 친할머니를 아빠 곁으로 보내드렸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산다고 친할머니한테 가보지 못했다. 아니 아예 찾아가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친할머니가 우리 아기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셨다는데 시집살이를 고되게 했던 엄마는 나에게 아기를 데리고 요양원 면회에 가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고 그때가 20대 후반이었음에도 나는 엄마에게서 정서적 독립이 되지 않은 상태라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돌아가시니 그게 너무 한스러웠다. 내 생각대로 밀어붙이지 못했던 것. 몰래라도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하지만 이별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 법이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 살에 아빠를 잃은 나는 죽음에 무디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동안 많이 아팠다. 평생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던 친할머니가 아빠 곁으로 가셨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이긴 했지만 한 사람이, 한 인생이 지는 일은 여전히 마음 아픈 일이긴 하다.
오늘 아침 엄마와 전화하다가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시다는 소식과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외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내일 남편이 휴가라 외할머니한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보다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게 훨씬 좋다는 교훈을 얻었기에 내일 항공권을 검색해보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를 미워했고 사랑했다. 그저 사랑만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서른 세 살에 혼자된 딸이 안쓰러워 나에게 울지 말고 씩씩하게 하루라도 빨리 홀로 서기를 요구했다. 무려 아홉 살에. 그리고 나와 동갑인 사촌 남동생이 있는데 그 아이와 나를 비교하며 매일 나를 예민하고 까칠하고 이상한 손녀로 대했다. 유치원 졸업식에 아이보리색의 고가의 코트를 외할머니가 사줘서 입고 찍은 사진도 있다. 외할머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외할머니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친할머니는 엄마를 괴롭히긴 했지만 친할머니에게 나는 평생 안쓰러운 네 살의 손녀였고 내 편이었고 사랑 그자체였다. 나에게 외할머니가 그런 것처럼 외할머니에게 나도 복잡한 손녀일 것이다. 우리 사이에 겹겹이 쌓인 다양한 감정의 지층들이 친할머니와의 이별보다 더 눈물이 나는 이유일까. 아직 외할머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떠나버릴 것 같아 벌써 슬프다.
나의 슬픔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엄마가 점점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다. 늘 씩씩하고 당당한 엄마인데 엄마를 잃어가는 엄마의 모습은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는 앙상한 가지처럼 참 쓸쓸해 보인다. 요즘 엄마가 많이 우는 것 같다. 엄마도 딸이었다. 나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 우는 엄마를 알아차릴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엄마는 제주도에서 먼 길 오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가고싶다. 무너져 내리는 엄마 옆에서 그저 그냥 있으려고 한다. 엄마가 차가워지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