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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Nov 12. 2024

작별인사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오늘 아침 할머니의 임종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할머니의 시간이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어제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할머니한테 간다고 하니, 엄마는 번거롭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장례식 때 오라며 간다는 나를 극구 말렸다. 안 그래도 힘든 엄마와 실랑이 벌이는 일이 엄마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단은 알겠다고 엄마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하루종일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엄마를 잃은 삼촌들과 이모, 엄마를 위로하러 가는 건데.'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다. 나를 큰 외삼촌댁 사촌동생(손자)과 차별하는 할머니를 싫어했다. 다투면 늘 손자편만 드는 할머니를 증오했다. 할머니가 나를 '울뱅이'(울보)라고 부를 때마다 진절머리가 났다. 맨날 나에게 아빠 없다고 울지 말고 씩씩하게 '빨리' 크라고 했다. 사실 그때 나는 아빠가 없어서 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없어서 울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크는 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할머니는 고생하는 딸의 모습을 보기 힘겨웠는지 나와 오빠에게 항상 '빨리' 크라는 주문 했다.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여자가 가방 끈 길면 못써. 느 엄마 힘들게 그만하고 직장 잡아서 빨리 돈 벌어라."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에게 내가 배운 것들은 정말 많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아량, 삶 대하는 태도, 역경과 고난을 헤처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대로 습득했다. 그래서 아주 가끔 나오는, 나의 당당함과 거침없음, 대범함, 씩씩함의 9할은 할머니 덕분이라고 말한다.


8남매의 첫째, 장녀였던 39년생 할머니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늘 할머니는 맞춤법을 틀리곤 하셨다. 그런 게 할머니의 매력이랄까. 트레이드 마크 같아 보여 정겨웠다. 할머니는 국민학교 4학년 나왔지만 자신의 모습에 주눅 들지 않고 더 당당하고 지혜롭게 사셨다. 할머니 식당에 놀러 가면 나는 항상 할머니의 장부에 틀린 맞춤법을 고쳐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맞춤법을 틀려도 세상을 사는 지혜만큼은 교수님 뺨치게 고차원이었다. 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그게 나에게로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인생은 드라마라서 때로는 연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늘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는 운전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다니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기가 타는 택시가 다 내차라고 하시며 전혀 주눅 들거나 자식들을 걱정에 빠지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까짓 것'이라는 말을 자주 쓰시곤 했다. "이까짓 것, 못할게 뭐가 있어." 그러시면서 늘 국민학교 4학년 밖에 못 나왔지만 이 장사, 저 장사하시면서 5남매 먹이고 입히고 공부 가르치며 훌륭하게 키웠다고 자부하는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 옆에 있으면 나도 아빠는 없지만 잘 살아 낼 수 있다는 용기가 솟았다. 늘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집에 와서 울거나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다독여준 적은 없지만 "왜 너는 남들처럼 못하는 거야. 아빠도 엄마도 없이 사는 애들도 있는데, 너는 이 할미도 있고 엄마도 있고 오빠도 있고 외삼촌들도 셋씩이나 있는데 네가 주눅 들게 뭐가 있냐"며 소리치던 할머니의 짱짱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뭔가 휘청거린다. 무엇보다 엄마가 전화를 걸 때마다 눈물 콧물 가득한 목소리다. 벌써부터 온몸이 아프다고 한다. 서른셋에 애둘 딸린 미망인이 된 엄마는 대장부 같은 할머니를 때론 남편으로, 아버지로, 엄마로 의지하며 살았다는 방증이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들과 에피소드들이 많이 떠오르는 건, 그만큼 가까웠다는 뜻일까. 예순다섯 살의 할머니는 "자다가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나는 "할머니, 원래 오래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죽는 얘기를 많이 한대. 할머니는 오래 살고 싶은 거야."라는 말을 해서 국자로 이마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ㅎㅎ 할머니가 사는 집에 가면 늘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같은 스팸도 엄마가 구워주는 것과 할머니가 구워주는 것은 맛이 달랐다. 할머니의 스팸이 훨씬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 밥을 좋아했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 곧 떠나려고 한다. 내 손으로 지은 밥을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것도 서운하고 할머니랑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것도 서운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모든 것이 서운하다. 그래도 그 서운함들 사이사이에 따뜻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서운함을 뒤로하고 웃으며 조금 기나긴 소풍을 가는 할머니에게 인사하러 가려고 한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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