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 씨, 잘 가, 그리고 꼭 다시 만나 우리.
할머니는 삼억이나 되는 빚을 밥장사로 다 갚으시고 칠순이 되어서야 식당을 접으셨다. 그 이후 큰 외삼촌이 모시고 계셨는데 (이것도 사연이 있다. 큰 아들이라서, 자진해서 모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서였다는 속사정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밤에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고 난 후 못된 큰 외숙모 때문에 재활시기를 놓쳐 그 길로 병상에 눕게 되셨고 살아는 계셨지만 사는 게 아닌 상태로 계셨다. 그러다 우울증과 함께 치매증상도 함께 왔다. 할머니를 모시고 계시면서 다른 형제들의 방문을 철저히 거부하고 막았던 큰 외숙모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엄마가 어느 날 겨우 허락을 받아 방문했다. (사실, 자식이 엄마를 보러 가는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고 웃긴 거다.) 할머니가 지내는 환경이며 분위기를 보며 거의 방치되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속상해하는 엄마에게 큰 외숙모는 “내 엄마냐, 네 엄마지. 이제 좀 모셔가라.”며 막말을 퍼부었다. ”나도 과부(엄마를 가리키는 말) 돼서 대접 좀 받자. (큰 외삼촌을 보며) 당신도 빨리 죽어. 나도 과부 돼서 대접받게. “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본인 자유라지만 세상에는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엄마에게 직접 했고 엄마는 울면서 큰 외삼촌댁을 나왔다. 며칠 후 엄마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원할 때즈음 병원으로 가서 그 길로 할머니를 엄마 집으로 모셔왔다. 그 후, 지극정성으로 할머니를 모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며 말버릇처럼 이야기하며 밤낮없이 간호를 했다. 때론 힘들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딸로서, 자식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참 많이 애썼다. 그러다 할머니가 열이 올라 해열제를 드셨는데도 열이 내려가지 않고 점점 부어오르는 손발을 보고 있자니 엄마는 겁이나 요양병원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알아보았다. 엄마는 요양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부터 할머니를 입원시키고 지금까지도 할머니를 볼 때마다 많이 운다.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한 달째, 할머니는 산소포화도가 낮아지고 혈압이 점점 낮아져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엄마가 지난 월요일에 말했다. 육지였으면 그냥 한달음에 갔을 텐데 이럴 때 보면 제주도가 섬은 섬이었다.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엄마와 상의를 해서 어제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당일치기로 다녀가기로 했다. 어제 아침 7시 반 비행기를 타고 청주공항에 내렸다. 50분 즈음 운전해서 친정에 도착했다. 마침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 면회시간이 되었고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건 지난 6월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눈도 잘 뜨고 계시고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라고도 하고 물도 달라고 말도 잘하셨는데 그때보다 눈을 제대로 뜨시지도 못하고 혀가 말려서 발음이 제대로 되시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몸 크기가 6월에 뵀을 때 보다 반에 반은 더 야위어 있었다. 사람이 꼭 이렇게까지 말라가며 죽어가야 하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안았다. 따뜻했다. 예전 할머니품에 폭 안기던 나는 이제 내 품에 할머니를 쏙 안을 만큼 컸고 할머니는 그만큼 또 작아졌다. 그래도 할머니품은 여전히 따뜻했다. 할머니의 손도 많이 부어있긴 했지만 30년 전 그대로 따뜻했다. 나는 할머니의 온기로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고 평화로워졌다. 평생 잊지 못할 할머니의 온기와 할머니 냄새. 나는 할머니 귀에 대고 크게 말했다.
"할머니, 나 어렸을 때 키워줘서 고마워. 그리고 할머니 너무너무 사랑해.
할머니가 잘 키워줘서 아빠 없어도 씩씩하게 시집도 가고 아들도 낳고 잘 살고 있어.
그리고 할머니한테 받은 만큼 못 돌려줘서 미안해. 할머니.
할머니랑 여행 한 번을 못 갔어. 미안해. 그동안 너무 너무 고생많았어. 할머니.
할머니 이제 곧 소풍 간대, 하늘나라로. 가면 우리 아빠도 만나고, 할머니 엄마도 만나고,
할머니 형제들도 만날 수 있대! 할머니 편안해지는 거야. 무서워 하지 않아도 돼, 할머니.
나도 할머니처럼 아기 예쁘게 키워놓고 손자손녀도 보고 할머니 보러 갈 거야.
우리 그때 꼭 다시 만나. 그때 만나면 나 어렸을 때처럼 꼭 안아줘야 돼. 알았지? "
할머니가 힘겹게 대답해줬다. "아라떵"
그 말을 듣고 나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내가 태어난 지 백일 되는 날, 아빠가 불치병 판정을 받은 이후로 나는 이 집 저 집 근근하며 친척들 손에 컸다. 그중에서도 제일 편했던 손길은 단연 외할머니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또렷이 기억나는 건 아홉 살 때다. 나에게 할머니는 엄마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서울에 있는 직장에 다니던 시절, 큰 외삼촌 댁에서 맡겨졌다. 그 일 년이 나에겐 지독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해였다. 그래도 그 지독한 그리움을 조금은 가볍게 해 주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였다. 매주 주말마다 오지도 않는 엄마를 대신해 식당문을 닫고 할머니가 큰 외삼촌댁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시곤 했는데 그날 밤 할머니 옆에서 자면서 맡는 할머니 냄새는 나에게 다음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런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실 준비를 하시고 계시다니. 예전에 건강한 할머니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먼 일 같이 느껴졌고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신다니 내 안에 뿌리가 휘청일 만큼 마음이 아프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혼자 있으면 눈물만 나고 속상한 마음이 들어 오히려 바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다. 내가 우는 걸 싫어했던 우리 할머니. 울지 않아야지. 이제 그만 울어야지. 씩씩해야지.
"고만 울어.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는 애들도 잘 살고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아! 용기 잃지 말고 항상 씩씩하게 댕겨. 너는 이 할미도 있고 서로 형제도 있고 엄마도 있고 외삼촌들도 서이나 있으니까 기죽지도 말어!"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에 와서 늘 오빠와 나를 보며 이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때는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데 아빠 없는 우리 남매를 보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에 대고 하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철없는 손녀딸은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든다.
지겹게 듣던 울지말고,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살라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많이, 정말 많이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