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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Nov 19. 2024

하얀 국화

향긋하지도 않고 차갑기만 한 국화가 왜 할머니 옆에 가득한 거야

아빠는 내가 네 살에 돌아가셨다. 그런 아빠를 생각할 때면 하얀 국화부터 떠오른다. 아빠와의 추억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아빠 산소에 가기 전에 꼭 하던 일이 아빠를 떠올리기에 더 가깝고 쉽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공원묘지로 가는 길에 즐비한 꽃집들 중 한 집에 들러 생화로 된 하얀 국화를 한 다발 사는 일이 아빠를 만나러 가기 전 꼭 하던 일이었다. 어른들은 생화로 된 국화를 사서 꼭 나에게 들게 했다. 안고 가는 동안 국화를 코에 가져다 대면 그리 향긋하지도 않았고 항상 냉장고에서 꺼내서 그런지 나에게는 늘 차가운 꽃이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 8시 30분경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토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장례식장 로비에 할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 사진 옆에 '외손' 하고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향긋하지도 않고 차가운, 그런 꽃이 왜 할머니 사진 옆에 가득 차 있는 것이며 앞에 놓여 있는 것인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이별의 시간이 와버렸다. 아직 할머니에게 보여드리지 못한 것들도 많고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도 많은데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예순다섯부터 "죽으면 편한걸 오래 살면 뭐 하냐, 늬 아빠가 질 편하다, 지금. ", "잠자다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노래를 불렀다. 마흔에 하늘나라로 떠난 아빠가 있었기에 예순 다섯 할머니의 죽음은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태어난 지 백일부터 사람은 태어나면 당연히 죽는다는 걸 온몸으로 배웠던지라 할머니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연하고 새롭지 않은 일이 며칠 전에 일어났고 나는 아직 많이 아프고 많이 슬프다.


아빠의 빈자리를 누가 대신 했던 것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기도 했고 항상 생계를 위해 일에 차여사는 엄마를 대신해 우리를 걱정하고 챙겨주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식당을 하시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밥과 반찬을 해놓고 가는 날이 많았는데, 그 일 때문에 내가 할머니를 우리 집 우렁각시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곤 했다. 할머니 밥은 참 맛있고 따뜻했다. 무엇보다 다양했고 풍성했다.


그런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고3 때 일이다. 큰 외삼촌네 사촌들과 내가 교회에서 싸우면서부터 시작됐다. 사촌들은 큰 외숙모에게 나와 있던 일을 자기네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했고 지금까지도 나이만큼 성숙하지 못한 큰 외숙모는 더 흥분해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그쪽 이야기만 듣고 나를 아주 많이 나무랐고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께도 나를 아주 무섭게 혼내라고 다그쳤다.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에 그때부터 할머니를 많이 미워했고 피했다. 어느 날은 우리 집에 찾아와 내가 사촌들과 싸운 일에 대해 나에게 싹수없이 행동한다며 나를 나무랐고 나는 억울한 마음에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말하지 마.“라고 소리치며 대들었다. 그 일 이후로 할머니와 내 사이는 서먹해졌고 멀어졌다. 아니, 할머니는 그대로였는데 할머니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가 변했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큰 외삼촌댁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기에 (이런 말이 우습지만) 더더욱 저쪽 편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여전히 고3에 머물러, 그때 공평하지 못했던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원망했고 미워했다. 그런 할머니가 1년 반 전, 성치 않은 몸으로 큰 외삼촌댁에서 엄마집으로 오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친정집에 갈 때마다 누워만 있는 할머니를 마주해야 했다. 기력이 없는 할머니는 불쌍했고 짠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화도 났다. 내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며 그때일은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되뇌며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켜켜이 묵혀두었던 모든 감정들이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이해가 됐다. 왜 할머니가 떠난 뒤에야 모든 퍼즐들이 맞춰지는 것일까.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조금이라도 할머니의 입장을 이해할 순 없었을까.


유독 다른 손자, 손녀들보다 눈물을 많이 흘렸던 우리 남매를 상조회사 분들도 기억할 만큼 우리는 참 많이 울었다. 손자, 손녀들끼리 앉아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 그 이유를 알았다. 할머니와의 추억과 에피소드는 우리 남매가 월등히 많기에 흘릴 눈물도 많다는 것을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없었기에 그랬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손자, 손녀들은 그저 푸근하고 따뜻한 일반적인 할머니에 대한 평범한 마음이라면 우리는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할머니였기에 그 마음의 농도가 훨씬 더 진했고 깊이는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할머니 장례식 여운이 오래갈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에겐 어쩌면 당연하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아빠 대신이었으니까. 우리는 삼십 년 만에 아빠를 또 잃었다. 그래도 지금은 나보다 더 슬플 엄마가 걱정되고 신경쓰일정도로 컸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기도 하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의 일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슬픔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슬픔을 나는 내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아빠를 잃고 살아온 삼십 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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