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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Nov 26. 2024

할머니, 잘 가. 안녕.

왕할머니 별을 찾아준 우리 아들

할머니 장례를 다 마치고 그날 밤 비행기로 돌아왔다. 비행기가 제주 땅을 밟는 순간,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주말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마치 꿈이었길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엄마, 왕할머니 별 저기 있다. 왕할머니 별이 우리 옆에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돼."

비행기 창문으로 밤하늘을 보던 아이의 말에 나는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한동안 감정의 파고가 출렁일 것이라며 갑자기 울컥하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맞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로 계속해서 마음이 출렁인다. 멀미가 날 정도로 출렁인다. 가라앉은 듯하다가도 다시 일렁이고 나를 집어삼킬 듯한 슬픔과 상실의 파도가 밀려와 나를 휩쓸고 지나가기도 했다가 다시 잠잠해지기도 했다가 여전히 왔다 갔다 한다.


갑자기 눈물을 쏟는 나에게 아들이 말했다.

"엄마, 할머니 벌써 천국 도착해서 커피 마시고 계셔. 너무 슬퍼하지 마요."

웃음이 나다가도 "할머니 커피 좋아했는데"하며 이내 울음이 터졌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참 많다. 많으려고 일부러 노력한 건 아니었고 나의 처지가, 나의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하늘나라로 갔고 남편을 잃은 우리 엄마는 꽤나 오랜 시간 방황하고 힘들어했다. 그 사이 나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고 그 손길을 내밀어준 이는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나에게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사람이 할머니였다는 것을. 나는 여덟 살에 엄마와 오빠와 함께 뉴질랜드로 떠나기로 했는데 비자문제로 나만 두고 엄마와 오빠가 먼저 떠났다. 공항에서 천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 품에 안겨 내내 울었다고 한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할머니는 "진짜 느어매, 내 딸이지만 그때는 진짜 지독혔어."라고 말하곤 했다. 비자문제가 해결된 이후 할머니와 단둘이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타고 엄마에게 갔다. 그 이후에도 나는 할머니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할머니와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할머니 막냇동생(외삼촌 할아버지) 집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와 다른 도시에 간 추억은 또 있다. 큰 외삼촌이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충남 태안에 갔다. 할머니의 둘째 여동생(이모할머니) 집을 지어주러 가는데 나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와 동행했다. 그렇게 항상 내 옆엔 엄마보다 할머니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울었나 보다.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였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함바식당할 때 새벽시장에 자주 따라가곤 했다. 할머니의 단골가게 이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태수상회. 태수상회에 가서 각종 음식재료들을 살 때도 할머니와 나, 큰 외삼촌은 함께였다.

"야는 누구여?" 하고 묻는 태수상회 사장님에게 할머니는 대답했다.

"이. 외손녀. 지 애비가 몇 년 전에 백혈병으로 죽었어."

"아이고. 그랬구먼. 이거 하나여?"

"이거 위로 아들 하나 있어."

"둘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대. 으이그. 착하게 크거라. 이거 까까 사 먹고."

태수상회 사장님은 나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시며 착하게 크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우리 아빠가 죽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할머니가 신기하면서도 싫었다. '자랑할 것도 아닌데 왜 자꾸 할머니는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왜 죽은 것까지 말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할머니의 입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에게 배웠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를 말이다. 아빠는 나의 아빠이기전에 할머니의 딸의 남편, 사위였다. 그런 사위가 떠나 방황하고 아파하는 딸을 지켜봐야 했던 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빠를 잃은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처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할머니는 주눅 들지 말라고 하시며 실제로 아빠 없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임을 자꾸 보여주며 나의 면역력을 길러주셨다. 할머니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아빠 없어도 할머니도 있고 외삼촌들도 서이나 되니까 그만 울고(어렸을 때 너무 많이 울어서, 별명이 울뱅이였다.) 주눅 들 필요 없고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 알았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11월 15일에 멈춰있었다. 겨우 이제야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할머니를 보낸 날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할머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깊이 아주 깊이 새겨지고 있다. 사실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 추억들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떤 물건이나 단어만 들어도 어쩔 때는 왈칵 눈물이 나오곤 한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항상 안아주고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남편과 아이가 있기에 든든하면서도 힘을 내 본다.


"엄마, 괜찮아.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 지켜보고 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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