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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Dec 01. 2024

서른여섯 손녀와 여든여섯 할머니

미움과 사랑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진자운동

하루에 몇 번이고 바뀌는 제주의 하늘을 볼 때마다 눈물이 차오른다. 나의 20대는 할머니에 대한 미움으로 얼룩져 있다. 그 계기는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열아홉, 대입을 앞두고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 큰 외삼촌댁 사촌과 크게 다투면서 시작됐다. 큰 외삼촌의 첫째 아들은 나보다 삼 개월 뒤에 태어났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처럼 컸다. 우리는 자전거 한 대를 번갈아가며 타야 했고 두 발 자전거를 서로 밀어주고 잡아주며 그렇게 컸다. 서로에게 선생님이었고 제자였고 동료였고 한 팀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그런 동갑내기 사촌동생과 사이가 나빠진 것은 비평준화 지역에서 나는 상위권 고등학교를, 사촌은 최하위권 고등학교를 가면서부터였다. 처음에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니던 우리의 관계는 똑같았다. 그러나 큰 외숙모가 학력차이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이는 조금씩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큰 외숙모는 나를 볼 때마다 "공부, 그까짓 게 뭐라고.", "공부 잘하면 뭐 해. 인간이 돼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실드 쳐준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침묵하기에 바빴다. 엄마마저도. 그런 외숙모의 열등감이 점점 더 말로 세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정말 사소한 일로 사촌과 나는 크게 싸웠다. 그때 할머니는 내 이야기 한 마디도 듣지도 않고 나를 보자마자 나무랐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할머니가 왜 일방적으로 나에게만 잘못을 뒤집어 씌웠을까.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나서야 그때 할머니의 말과 행동들이 퍼즐조각 맞춰지듯 이해가 됐다. 사촌과 내가 싸운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그저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었다. 물속에 숨어있는 어마어마한 외갓집 식구들 관계의 역동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이번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알게 됐다. 조금 더 빨리, 20대에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할머니를 덜 미워했을 텐데 참 아쉽다. 그때는 그저 공평하게 대해주지 않는 할머니를 원망하고 심하게는 저주했다. 어리석은 노인이라고 마음속으로 비난도 많이 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할 때 밥을 먹을 때면 가끔 할머니 밥이 그리워 할머니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내가 아이러니했지만 내가 불편한 건 할머니가 아니라 큰 외숙모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안타깝게도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불편한 사람을 더 의식해서 좋아하는 사람들까지도 멀어진 경험이 꽤 있다.


그렇게 할머니에 대한 감정은 미움과 사랑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진자운동처럼 왔다 갔다 했다. 할머니는 결국 큰 아들인, 큰 외삼촌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들이 할머니를 모신다는 이유로 다른 자식들에게 받는 용돈을 그 집 살림에 보태야 했기에 할머니는 자신을 희생하며 내린 선택이었다. 할머니가 그 집으로 들어간 이후 찾아뵙는 게 꺼려졌고 나는 발길을 끊었다. 사실 큰 외숙모도 다른 자식들이 드나드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았다. 밉고 원망스러웠던 할머니였지만 보고는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원 플러스 원처럼 따라다니는 큰 외숙모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을 이겨버렸고 그렇게 몇 년 동안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불효손녀.


결혼 이후,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아이 커가는 줄만 알았지 할머니의 시간도 아이가 크는 시간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내가 스무 살 때 본 할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일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 마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것처럼 말이다. 내 나이가 마흔에서 쉰쯤 되면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으려니 하며 할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해결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냥 마음 한쪽 구석에 밀어 두고 들여다 보지 못했다. 들여다 보지 않았다는 게 더 맞다. 할머니가 이렇게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그랬다. 그 때의 어리석었던 나를 마음껏 원망하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할머니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열심히 할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있다. "할머니, 잘 가."라고 수십, 수백번을 되뇌일수록 할머니는 내 마음 속에 단단한 기둥으로 새겨진다. 할머니가 했던 말들, 할머니가 알려준 인생철학, 할머니가 몸소 보여준 인생살이가 내 안에 뿌리가 되어 더 단단해지고 있는 시간이라 여기며 괜찮다가도 안괜찮아지는 마음 조차도 인정하고 안아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움과 사랑사이에서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감정의 역동이 이제는 할머니에 대한 존경, 감사에 수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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