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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이었던 그녀들의 완전한 타인 되기

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나의 역할 : 훈장질과 감정쓰레기통

by 장원희 Jan 30. 2025

엄마를 온전히 사랑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버림을 받았고 항상 기다려야 했다.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아련한 마음은 늘 오빠에게 기울어져 있었고 나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탈을 쓴 인정과 칭찬이었기에 노력해야만 받을 있는, 조건적인 사랑이었다. 그래서 공부에 매달렸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을 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서적 남편의 역할을 완벽하게 잘 해내야 했다. 엄마의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잘 해내는 것 또한 사랑받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했고 불편한 감정을 참아야만 했고 엄마를 하염없이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갔고 마음의 병을 얻었다. 점점 클수록 관계에 있어서 불안도가 높아졌고 불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그 영향으로 제대로 된 친구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셋이 모이면 늘 이상하게도 외톨이가 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었다.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이 마음이 덜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중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아, 지금까지 안부를 묻고 연락을 하고 가끔 만나는 친구 한 명이 전부다. 

  

재수까지 해서 간 대학에서는 무조건 공부에 매달려 조기졸업에 수석졸업까지 했다. 졸업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았다. 공부나 학점과 상관없는 일은 필요 없는 일이라 여기며 냉혈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살았다. 결국 엄마에게 학사모와 졸업장, 상장을 안겨드렸다. 그날 엄마는 나를 뒷바라지해 준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처럼 흡족해했다. 그 일을 마지막으로 나는 번아웃이 왔고 대학원 진학을 취소했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 백수가 되었고 인생의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조기졸업과 수석졸업이라는 목적지, 그다음은 내게 없었다. 엄마의 인정과 칭찬만 따라왔더니 길을 잃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스무 살 중반, 여전히 내 마음은 공허했으며 삶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졌고 무기력에 푹 빠져지 냈다. 침대에서 하루종일 나오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씻지도 않고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런 나를 엄마는 그저 기다린다는 표현으로 방치했다. 이만큼 키워놨으면 그다음은 알아서 좀 했으면 하며 귀찮아하는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래도 감사한 부분은 돈에 있어서는 최대한 지원을 해주셨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수강료 지원을 해주셨고  서울에서 지낼 곳의 월세까지 지원해 주셨다. 방치를 했더라도 이건 명백하게 감사한 부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이 곧 사랑인 엄마는 나의 부족한 사랑주머니를 평생 채워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힘들다고 하는 나에게 너는 힘들면 안 된다는 가스라이팅을 계속해서 해왔고 그럴수록 나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어쩌면 그때부터 엄마에게 사랑받는 딸이 되는 것을 포기해 갔을지도 모른다. 온실 속 화초로 키워놓고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야생으로 나가라는 엄마가 야박하다고 느꼈고 있는 힘껏 욕하고 원망했다. 그럴수록 내 삶은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비루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20대 중반에 시작한 방송작가 일. 첫 사회생활에서 정신이 없던 나의 텅텅 빈 사랑주머니를 알아챈 남자가 나타났다. "너는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해. 내가 사랑 많이 해줄게." 라며 안아주던 남자. 그의 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평생을 옆에 두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의 사랑에 목숨을 거는 일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결심하고 결혼 준비를 해나갔다. 요즘도 어렵다고 하는 결혼준비가 우리에게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신났고 행복했다. 젊었기에 가능했을까. 그때는 그저 결혼이라는 제도에 이 사람과 묶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감사한 일이었다. 웨딩촬영이며 신혼여행이며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일까. 


결혼 후, 6개월 만에 임신을 했고 나는 내 생일 하루 전날 엄마가 되었다. 빌어 먹을. 나는 다시 엄마 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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