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Jun 06. 2024

9년 차 이방인

좋을 땐 우리, 나쁠 땐 너

늘 조급한 건 부모고, 그 조급함은 일을 망치기 일쑤다. 제주로 이사하고 시부모님께서 오셨다. 동네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왔다. 집도 구경하실 겸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아버지가 진행 중인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는 느닷없이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시며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셔서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또 이렇게 당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시아버지는 아이방으로 가서 누우셨다. 옆에서 시어머니는 내가 형님한테 먼저 쌀쌀맞게 구는 거 봤다며 한마디 거드셨다. 나도 모르게 “아니 그게 아니라요.”로 시작해서 내 할 말을 했다. 무슨 정신으로 쏟아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간에 서운한 감정을 다 쏟아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날의 억울함은 토로했다. 마치 친구랑 다투고 나 혼자 있는데 친구 엄마아빠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너 왜 우리 딸이랑 싸웠냐며 네가 먼저 그러지 않았냐며 따지고 드는 듯한 상황처럼 느껴져서 매우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나도 아빠는 없지만 내편 들어줄 엄마는 있는데 말이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이렇게 당해야 하는 운명인가. 좋을 땐 우리 가족 나쁠 땐 네가 되어버리는 나는 9년째 이 집의 이방인이었다.


열흘 전쯤 시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제주도에 왔는데 내일 오전 10시에 공항으로 나올 수 있냐고. 아마 육지로 돌아가시는 길에 손자가 보고 싶으셨나 보다. 사실 시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늘 혼자 열받고 합리화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회복하는 패턴이었는데 그날 나는 아직도 우애 있게 지내라고 했던 그날의 감정이 휘발되기 전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고 껄끄러웠다. 그래서 남편에게 연락하라고 부탁했고 남편이 장소를 변경해서 약속을 잡았다. 다음날 우리는 약속장소에 나갔고 못 온다는 문자를 남편이 도착해서 보게 됐다.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갑자기 연락 온 것도 별로였지만 원래 일정을 미루고 간 건데 약속장소에 못 나온 것에 대한 사과의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좀 많이 황당했다. 그리고 정말 다른 집안이구나를 느꼈다. 남편말에 의하면 그래도 손자 장난감은 사주라는 소리가 미안하단 소리라는 데, 그게 어떻게 미안하단 소리지? 싶었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오기 전부터 비행기표를 끊은 순간부터 언제 몇 시에 만나자고 하는 파워 J인 친정과는 너무도 다른, 틀린 게 아닌 다른 시댁의 소통방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남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이고 내가 당신 나라 말을 못 알아듣겠으니 중간에서 남편이 통역을 잘해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두 집안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봤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명절날 아침을 먹고 친정에 가려는 엄마에게 친할머니는 시누 오면 보고 점심 먹고 가라고 그러셨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그럼 미자도 오지 말라고 하라며 미자는 친정 오고 이 사람은 왜 친정에 못 가게 하냐고 그랬다고 한다. 이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나였다. 나는 결혼 전 추석에 인사드리러 갔더니 형님 오면 보고 가라고 해서 기다렸다. 형님네 부부가 오니 저녁 먹고 가라 해서 저녁까지 먹었다. 먹고 나니 해가 졌다. 자기 아들 밤운전 힘드니 내일아침에 가라던 시아버지가 너무 불편했던 기억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우리가 정말 다른 집안에서 자랐다는 게 실감 난다고 했다. 가운데서 본인이 나를 배려하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아 미안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했다.


당사자에게 사과를 받거나 감정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구구절절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데 나는 9년 차지만 그들의 대화를 잘 못 알아듣는다. 태어나서 충남 보령 아래로는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경상도 사투리는 거의 외국어였다. 흡사 필리핀어인 따갈로그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사투리는 흉내만 낼뿐 원어민들의 찐 사투리는 진짜 알아듣기 어렵다. 억양과 속도까지 덧붙여지면서 조사와 어미만 알아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다수라는 이유로 내가 이상하고 왜 나는 시댁에 적응을 못하는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맞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고 섞이려야 섞일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서로 이만 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자질구레하고 구질구질한 이유들로 나는 시댁 카톡방이 정말 너무 매우 싫다. 당장이라도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 싶지만 이미 분란 만드는 이미지인데 그 이미지가 더 강력해질까 읽씹 하거나 대충 대답하는 중이다. 사소한 일들이 켜켜이 쌓였고 상처 입은 곳에 또 상처를 입으면 더 쓰라린 것처럼 별 일 아닌 일인 줄 아는데도 발작버튼이 눌려 속이 뒤집히고 2주 동안 자살충동을 겪을 만큼 힘들었다. 사실 자살충동은 처음이 아니었고 남편 말대로 나는 죽을 용기가 없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또한 동굴이 아니라 터널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견뎠다. 육지에서 받아온 정신과 소견서를 쓸 타이밍인가 보다 하며 시내 정신과에 전화를 걸었고 예약을 했다. 정신과는 응급환자도 있다던데 다 예약을 해야 진료가 가능한 게 조금은 답답했다. 금요일 11시.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이전 02화 예단, 하자 있는 애들이 하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