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 경력 9년 차
작년 크리스마스.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남편과 연애할 때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9년 뒤에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제주 발령소식을 듣고 좋아하기는커녕 눈앞이 깜깜했다. 아이를 키우며 쌓았던 몇 안 되는 소중한 우정들과 아이의 교육환경,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6시간 동안 온전히 내 이름으로 살 수 있던 파트타임 일자리, 단박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고 결정된 일이었기에 빨리 받아들였다. 신혼 때부터 함께 한 묵은 짐들을 열심히 채소마켓에 올리고 팔았다. 평수를 반으로 줄여가다 보니 치워야 할게 한둘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막상 하다 보면 끝이 보이고 다 하고 보니 좋긴 좋았다.
지난 크리스마스. 홀가분한 마음 반, 섭섭한 마음 반으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오자마자 아이가 방학이라 두 달 동안 꼭 붙어서 지냈다. 힘들기도 했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나를 지탱해 주는 듯했다. 아이가 웃으면 나도 웃음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한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봄이 왔고 아이는 우리 부부의 걱정과 달리 새로운 학교에 너무도 잘 적응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빈 둥지 증후군처럼 마음 한쪽에 허전함이 불쑥 올라오고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학교 간 사이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1시 50분에 수업이 끝나는 아이를 데리러 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는 건 아이를 기관에 보내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집안일을 하다 끝나는 자유시간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자격증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 초조 짜증이 올라오는 병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어떤 성취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 왔던 터라 그럴까. 존재만으로 괜찮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아본 적이 없어서일까. 4년제 대학을 3년에 조기 졸업을 했을 만큼 열심히 살았고 그 전 직장에서도 밤낮없이 일을 했다. 그런 내가 좋았고 하루하루가 뿌듯했다.
결혼 전 나는 상주하는 프리랜서였다. 입덧이 심해 회의를 하다가도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날락 거려 회의에 방해가 됐고 해고통보 아닌 해고통보를 받았다. 입덧은 끝났지만 임신한 채로 이직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직종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사셨고 일을 하고 계셔서 맡길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 경단녀가 되었다. 경단녀라기보다 경포녀가 더 알맞은 말 같다. 경력을 포기한 여자.
그런 나의 선택을 비난이라도 하듯 자존감이 팍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절대 잊히지 않는 8년 전 일이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시댁에 내려갔다. 당시 나는 시어머니 차 뒷좌석에 당시 5개월이었던 아이를 안고 있었고 남편은 조수석에 탔다. 늘 시어머니는 시할머니의 이기적인 면을 하소연하듯 혼자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신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남편이 화제를 돌렸다.
"누나네는 아기 안 낳아?"
우리 부부와 같은 해에 두 달 먼저 결혼한 형님 부부는 아직 아이소식이 없었다.
“누나는 나중에 낳아도 되고 여자가 경제력이 있어야지. 남편카드로 눈치 보면서 고기 사는 게 얼마나 별로인지 모른다. 나는 내 카드로, 내 마음대로 눈치 안 보고 식구들 올 때마다 고기 사다 놓고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정적이 흘렀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남편이 꺼내고 어머니가 뱉은 말이 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요즘은 늦게 낳는 추세라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때 낳는 게 더 좋다.”
어머니는 쐐기를 박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차에서 아이를 안고 있던 그날의 내 모습, 창밖의 풍경, 덜컥 내려앉았던 내 마음, 단전에서부터 뜨거워지는 느낌, 경제력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경제력 없는, 별로인 여자가 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 초조 짜증이 올라는 병이 심해졌다. 아이가 기관에 갔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열심히 했다. 시간만 맞으면 어떤 일이든 했다. 아이의 하원시간에 지장이 없는 일들로 구했다. 물류센터 소분헬퍼, 식당서빙알바, 새벽우유배달, 출판사 사무보조, 인터넷 쇼핑몰 포장알바, 카페 매니저. 경제력 없는, 별로인 여자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힘든 일이었지만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그날의 나에게 조금은 떳떳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그때의 상처를 극복한 줄 알았다. 다시 집에 주저앉게 되니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온다. '여자가 경제력이 있어야지.' 다시 나는 경제력 없는 별로인 여자라는 지옥에 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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