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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13. 2024

화분 트라우마

3월이 싫어진 이유

매년 2월에는 3월 초에 시어머니께 보낼 화분을 예약한다.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셔서 2년마다 근무지를 옮기시곤 하는데 보통 2월에 발령이 나고 3월부터 근무를 하신다.


화분을 예약할 때면 처음 화분을 보내게 된 때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가 설 연휴였는데 남편이 명절휴일 상관없이 일하는 직업이라 명절에는 못 찾아뵀다. 그것도 아이가 태어난 지 50일 즈음이 설연휴였는데 엄동설한에 차로 3시간 거리를 아이와 나만 내려오라고 하시는 걸 남편이 선을 그어서 내려가지 않아도 되도록 해줬다. 그래서 원래 명절 전날 밤과 명절 당일 아침에 영상통화로 나마 인사를 드리는데 그날이 명절 전날 밤이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했다. 남편이 일을 하다 에스컬레이터에 무릎을 찍혀 왔다. 뛰어 올라가다가 걸려 넘어졌단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 남편은 그냥 까진 거겠거니 하며 약 바르면 되는 줄 알고 며칠을 밴드만 붙이고 지냈다. 그날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돌아온 남편의 상처를 보니 노랗게 곪아가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얼른 동네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필 연휴인 데다가 밤 시간이라 열려있는 응급실이 많지 않아 병원을 여러 군데 돌아다녀야 했다. 안아달라는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치료해 주실 의사 선생님이 계신지 여쭈어야 했다. 몇 군데에서 거절을 당하고 드디어 찾은 병원에서 남편은 부분마취를 하고 곪은 상처를 긁어냈다. 상처가 꽤나 깊었다. 까진 게 아니라 찢어진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참았냐고 하시는데 옆에서 상처를 보던 내가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냥 미안하고 속상했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는 밤 11시쯤이 다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졸려서 보채는 아이를 옷 갈아입혀 재우고 나서 핸드폰을 보게 되었다.


영상통화를 기다리시던 어머니가 화가 나셨는지 시부모님과 시누부부, 우리 부부 이렇게 있는 시댁단톡방에서 장문의 메시지로 따지시며 화를 내고 계셨다. 부재중 전화도 없었는데 깜짝 놀랐다. 그저 우리의 전화를 기다리시다가 화가 나신 모양이었다. 너희는 왜 연락이 없는지부터 시작해서 결혼을 했으면 블라블라블라 며느리의 의무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그리고 본인이 2월 1일에 교감으로 발령 나서 어디 학교로 가는데 남들은 축하해 주고 멋지다고 해주는데 아들 며느리는 왜 축하도 해주지 않냐는 것이었다. 교감실은 많은 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 너희 축하 화분을 꼭 받아야겠으니 어디 학교로 3월 며칠에 화분 보내라고 하셨다. 평소 남들에게는 소탈함을 강조하시는 모습을 보다 보니 이렇게 또 보이는 게 중요한 분들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단 나는 어머니가 교감으로 발령 난 것도 그때 알았으며(아마 몇 십 개의 메시지를 그냥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꼼꼼히 읽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는 단톡방이기에...) 남편도 나도 무릎 상처를 꿰매고 와서 핸드폰을 확인한 상황이었다. 애들이 연락이 없으면 먼저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게 부모 마음이 아닌가. 자기 아들 무릎 꿰매느라 이제야 봤다고 하면 과연 뻘쭘해나 하실지 궁금했다. 없던 정도 떨어지게 만드는 시댁매직. 일에는 순서 있는데, 냅다 화만 내신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와서 변명을 하자면 우리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그랬다면 죄송할 일이지만 아이가 졸려서 보채는 상황에서 응급실은 알아봐야 했고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다 보니 더더욱 신경 쓸 이유가 없기도 했다.


속이 좁아터진 나는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남편에게 미뤘다. 남편은 답장을 쓰다가 열이 받았는지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께 전화를 했고 우리가 연락이 안 됐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실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때는 화가 난 듯 보였다. 화를 꾹꾹 눌러가며 할 말을 하고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기 때문에 아이까지 둘러업고 병원을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엄마한테 화가 났다며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이었다. 남편이 어머니한테 언성을 높인 적은.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이해한다고 했다.


며칠 후 친정엄마가 오셨다. 화분을 알아보는 나를 보며 누구한테 화분 보낼 일이 있냐고 물으셨고 설 연휴에 있던 일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한숨을 쉬시며 이러라고 시집보낸 게 아닌데 참 속상하다고 처음으로 이야기하셨고 나는 그런 마음 들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엄마는 사실 이런 모습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신혼 초 첫 명절에 남편은 해외출장일정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남편 없이 시댁에 혼자 가기가 어렵다고 했고 남편은 어머니께 말씀드렸고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며 편히 지내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친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엄마와 목욕탕에서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데 어머니에게서 장문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왜 안 오냐는 메시지였다. 남편이 분명 어머니께 잘 말씀드렸고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면서 편히 지내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아직도 왜 그러셨는지는 모른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답장을 했으면 됐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해외출장 가있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며칠 뒤 어머니와 형님부부가 남편이 출장 간 곳에 가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 이야기를 하셨는지 남편이 놀라서 전화가 왔다. 그런 일이 있었냐고 미안하다고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어차피 남편이 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고 생각했고 일하고 있는 사람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오면 얼굴 보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 이후 어머니가 연락이 오시면 쉽게 받아지지가 않아 전화를 피했다. 어머니는 나와 연락이 닿지 않자 남편이 아니라 친정 엄마 회사로 전화해 내가 어른이 연락해도 받지도 않는다며 전화를 하셔서 화를 내셨다고 한다. 엄마는 바로 3시간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며 내려가셨다. 엄마는 청심환까지 드시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앉자마자 어머니는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랑 비슷한 생뚱맞은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듣다가 ‘지금 아이가 전화 안 받는다 하셔서 그 이야기 들으러 온 거지 내가 이런 얘기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으셨다며 한마디 하셨다고 했다. “나는 서른셋에 혼자되어서 최선을 다해서 키운, 금쪽같은 내 딸 그쪽 집안에 준 죄 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연락을 안 받을 때는 왜 안 받는지, 그간 아이와 있던 일들에서 아이가 상처받진 않았는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아이가 연락을 안 받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드님한테는 명절에 안 와도 된다, 편히 지내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래놓으시고 아이에게는 또 왜 안 오냐고 하시면 아이가 헷갈리지 않습니까? 아이는 사부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에요. 이제 막 결혼생활 시작한 아이들입니다. 둘이 맞춰기에도 벅찬 시간일 텐데 무조건 사부인에게만 맞추라고 하는 건 우리 세대나 통했지, 지금 아이들에게는 안 통하는 걸로 압니다. “라고 하셨고 시어머니는 바로 죄송하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다. 엄마는 딸 때문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는데 가셔서 까지 속상해서 돌아오시는 길에 많이 우셨다고 한다. 그때만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엄마의 한숨을 뒤로하고 어머니가 발령받으신 학교와 같은 지역에 있는 꽃집을 검색했고 화분배달을 문의했다. 화분 사진을 몇 개 받았고 흔하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이 아이는 안시리움이라는 꽃인데요. 키우기도 수월하고 예뻐요.”라는 사장님의 말에 안시리움... 안시리움... 안쓰러움... 무언가 이 상황과 비슷한 이름이었다. 사실 꽃이나 화분을 보내는 일은 대부분 좋은 일일 때가 많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고 하기가 싫은지. 축하는 진심으로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강제축하는 또 처음이었다. 화분은 죄가 없다. 화분을 보내게 된 계기가 썩 좋지는 못할 뿐이다. 이제 지겹도록 보낸 화분도 곧 내년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화분을 보낼 땐 어떤 마음이 들지 궁금하다. 당연히 후련할지, 아니면 의외로 섭섭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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