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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17. 2024

병원 가는 날

난 용감했고 도전했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지난주 금요일이 예약일이었는데 그림책 수업이 있어서 미뤘다. 내일은 친정에 가는데 약이 다 떨어져서 오늘 꼭 가야 한다. 또 냉장고에 먹을 식량이 부족해 마트에 들러 채워놔야 했다. 그런데 아이가 어젯밤부터 열이 나서 오늘 학교에 가지 못했다. 왜 항상 일들은 한꺼번에 몰리는지 속상했다. 친정일만 아니면 아이를 먼저 돌보고 병원 예약을 하루 이틀 미룰 텐데 말이다.


나는 다행히 예약시간에 맞춰서 병원에 갔다. 2주 만에 본 선생님이 반가웠다.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어떠셨어요~?"


“시댁 일이 있었는데요. 저번에 선생님께서 성격은 바꿀 수 없지만 알고 있으면 도움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 회피하고 감정억압하고 했던 패턴을 벗어나서 제 목소리를 냈어요.”


“오. 엄청 큰 용기를 내셨네요. 어떤 일이셨을까요?”

선생님은 마치 생각지도 못한 좋은 소식을 들은 것처럼 나의 목소리를 냈다는 말을 반가워하셨다.


“네. 시아버지가 제 SNS에 팔로우를 하셔서 정중히 거절하고 계정을 비공개로 바꿨고요. 제가 직접 말씀드렸어요. “


“반응은 어떠셨나요?”

“화 내시더라고요. “

“어.. 그러셨군요.”


“직접적인 화라기보다는 기분 나쁜 티를 많이 내셔서 대화가 잘 풀리진 않았어요. “


“그래서 기분이 어떠셨어요?”


“제 할 말을 해서 그런지 예전처럼 그 일을 곱씹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마음도 상하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지난 일이 되었죠. 생각도 잘 안 나고 평소처럼 생활도 잘했어요.”


“그전에는 이렇게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


“아니요. 전혀요. 남편에게만 뭐라고 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아이에게 짜증도 내고 그랬죠. 제가 직접 불편하다고 이야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와. 정말 큰 도전을 하신 거네요. 아까 환자분이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시아버지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를 하시고 받아들이셨나요? “


“저는 그냥 시아버지가 팔로우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게 민망해서 변명도 구질구질하게 하는구나. 참 속이 좁아터졌구나. 이렇게 받아들였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


“시아버지가 며느리 SNS 팔로우하는 게 사실 평범한 일은 아니세요. 그래도 그런 점을 어떻게 이야기를 하시고 잘 받아들이셨네요. “


처음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제삼자와 시아버지 팔로우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 일이 있고 나서 불안했는데 아닌 척했던 건지, 내 무의식이 불안을 밀어내고 있었는지, 선생님의 공감에 나는 마음이 안심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목소리를 내고 나서 ‘난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나름 많이 불안했나 보다.


”선생님, 몇 가지 제가 궁금한 사항들을 적어왔는데 질문드려도 될까요? “


“네. 그럼요.”

나는 그동안 지내면서 궁금했던 몇 가지를 적어온 노트를 꺼냈다.


“예전에는 시댁일이 생기면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감정이 상해서 계속 그 일을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남편에게 화내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일종의 강박장애일까요?”


“강박장애는 몰두하고 생각하는 것이 강박행동까지 이어지는데 환자분은 그렇지 않으세요.”


“그렇군요. 그리고 감정기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는 양극성 장애인가요?”


“어.. 아니요. 양극성 장애를 진단 내릴 때는 기준이 좀 더 세분화되어 있고 그래서 더 깊이 있게 관찰하고 진단 내려야 하는데 환자분은 아니세요. 음,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으셔서 감정기복이 있으신 걸로 보여요. “


“네.. 그렇군요. “

타닥타닥 오늘도 바쁜 선생님의 손을 바라보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입을 뗐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저대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남편이 따로 시아버지께 전화해서 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는데 이후 연락이 없으시거든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사과를 하실 수도, 안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냥 사과 왜 안 하시냐고 이야기는 드려볼까 고민 중이에요. 궁금하기도 하고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그냥 그렇게 정체된 느낌이라서요. “


“그 이후에 아무 말씀이 없으시군요. 그런데 상대가 어떤 반응을 하든지 그 반응과 결과를 환자분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해요. “


“그렇군요. 사과 안 하면 그냥 역시 속이 좁아터졌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것도 같고.. 기분이 썩 좋지않은 대화가 될 것 같네요. “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처럼 본인 목소리를 내시고 결과를 잘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경험이 한 번으로는 어렵고 계속해서 쌓이면 환자분이 좋아질 수 있어요. 큰 용기 내신 건 정말 놀랍네요.”


칭찬받았다. 그런데 이런 칭찬 듣기 전까지는 스스로 용기를 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메시지를 보내는 내 모습을 보던 남편이 “오. 세졌다.”라고 말했을 땐 몰랐다. 내가 큰 용기를 내어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큰 용기 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무언가가 불쑥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용기 있게 도전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선생님의 칭찬에 시아버지에게 전화할 용기가 조금씩 생기고 있는 듯했다. 사과를 하든 안 하든 내 목소리를, 내 말을 흥분하지 않고 잘 전달할 용기 말이다.


“그리고 선생님, 제가 잠을 열 시쯤 자서 세 네시에 꼭 깨는데요. “


“약을 먹고도 그러시나요?”

“네. 그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은 항상 그쯤 눈이 떠지더라고요.”


“그러면 다시 주무시나요?”

“다시 잘 때 있고 그냥 일어날 때도 있고요.”

“세네시부터 활동을 하신다고요?”

“네..”

“낮잠은 주무시나요?”

“아니요.”

“힘드시겠어요. 활동을 하시면 무엇을 하세요? “

“한 시간 정도는 자려고 누워있고요. 잠이 안 들면 다섯 시반쯤 강아지 데리고 오름에 가요.”


“어.. 약을 증량했는데도 그러신다는 거군요. 약을 한번 바꿔볼게요. “


“네.”


“다음 주에는 제가 학회도 있고 해서 3주 뒤에 뵐게요. 3주 동안 이런 일들이 생기면 기분이 어땠는지 그때 또 이야기해 주세요.”


“이런 일이요?”

“네. 용기 있게 도전하신 일이요.”

“아 네. 감사합니다. “


진료실 문을 열때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내가 정말 용기 있게 도전한 일이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이 아닐지라도 겁이 많고 소심한 나에게는 큰 산을 하나 넘은 것만큼이나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간의 수많은 걱정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남편에게 본인입으로 본인이 삐졌었다고 이야기한 시아버지만 있을 뿐, 내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시아버지께 다시 연락을 드리는 일,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문제였다. 그냥 단절을 할 것인지, 어떻게든 우당탕탕 이어갈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나의 이런 고민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고 용기가 나는 순간 결정이 날 듯싶다. 그렇게 오늘도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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