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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14. 2024

민들레는 민들레

나로 살아가기

오늘은 그림책 수업을 들으러 가는 첫날이다. 동아리 활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는 그림책 테라피 수업을 신청했는데 높은 경쟁률이었음에도 운 좋게 수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책은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했는 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많은 깨달음도 얻고 위로도 받아서 그림책을 공부하고 싶어 졌고 모집안내문을 보자마자 신청하게 됐다.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던 시간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수업장소로 갔다. 첫 시간.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그림책은 <민들레는 민들레>였다. 꽤나 큰 울림이 있어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그림책 <민들레는 민들레>


어쩌면 나는, 나를 나라는 개인으로 인지하기보다는 어떤 관계나 역할로서 인지하고 있을 때가 많다. 엄마, 아내, 딸, 동생, 친구, 이웃, 그리고 며느리... 이런 역할로 인지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는 하지만 역할에만 매몰되어 지내다 보면 진정한 나를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같다. 이 그림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든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야기를 울림 있게 한다. 내가 아내일 때도 나는 나고 엄마일 때도 나는 나다. 단순해 보이는 듯 하지만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표지에 민들레씨가 날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해 첫 장에서는 민들레 씨가 싹을 틔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다음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민들레꽃이 곳곳에 피어있는 장면이 이어지다가 씨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마치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는 인생처럼 느껴졌다.


특히 후반부에 민들레 씨가 하늘하늘 날아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작년 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스무 해 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까만 파마머리에 몸빼바지가 잘 어울릴 만큼 퉁퉁하셨다. 그런 할머니는 너무도 작고 왜소한 모습으로 아빠가 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납골당에 모셨는데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했던 할머니가 한 줌의 재가 되었을 때는 참 많이 울었다. 늘 나를 꼭 안아주었던 할머니 품 냄새는 아직도 생생한데, 다시 안아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되었다. 항상 내 곁에 있어줄 것만 같은 할머니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났지만 많이 슬프고 많이 그립다.


지금의 나는 어디쯤 있을까. 민들레가 시멘트 틈에 피어있는 장면, 너른 들판에 피어있는 장면, 기와지붕 위에 피어있는 장면을 보며 작년 12월에 제주로 오게 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육지에 있을 때와 생활도 마음도 관점도 생각도 많이 달라진 나지만 여전히 민들레는 민들레이듯, 나는 나다.


자신을 꽃으로 표현하는 활동을 했다. 나는 어떤 꽃일까.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이리도 어렵다니. 평소에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해 왔는 데 아니었다보다. 고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너는 장미꽃이야. 화려한 모습에 사람들이 다가오지만 가시가 있어서 가까이할수록 아파한단다." 화려하진 않지만 가시가 있는 부분은 맞았다. 나는 예민했고 까칠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진 편인데 때때로 그런 가시 같은 면들이 나오는 것도 같지만 현재 나는 더 이상 장미는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어떤 꽃을 그려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고민 끝에 계란프라이 꽃이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이름은 개망초. 개망초로 정했다.


나는 아빠 없이 보낸 어린 시절을 장미에 비유하고 싶다. 늘 엄마는 오빠와 나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라 그렇다는 소리 안 듣게 잘하라고 엄하게 교육하셨다. 다른 애들이 인사를 안 하면 그냥 안 하는구나 할 수 있지만 너희가 인사를 안 하면 아비 없이 커서 버릇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예의 있게 행동하는 것을 강조하셨고 몸가짐과 행동에 대해 교육을 하실 때는 항상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안 듣게"를 꼭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나에게 상처로 남아 아빠 없는 아이라는 딱지를 스스로에게 붙이고 의식하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이라는 새 둥지가 생겼을 때 힘든 점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그렇게 부러워하고 꿈꾸던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점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꽃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육지에 살 때 우리 동네에는 민들레보다 흔하게 피어있던 꽃이 계란프라이 꽃이었다. 그래서 계란 프라이꽃을 그렸다. 왜 이 꽃을 그리게 됐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그린 개망초. 일명 계란프라이 꽃.


“제가 다섯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오빠, 저 이렇게 셋이서 살았는데요. 그때는 뭔가 아빠 없는 아이라며 특별하게 또는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이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다 보니 비로소 제가 꿈꾸던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살 때 동네에서 민들레보다 흔하게 보던 계란프라이꽃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나를 꽃에 비유하라는 의도에 부합하진 않는 듯 하지만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계란프라이 꽃처럼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하게 된 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가족의 모습은 다양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맞다. 가족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 내 주변은 아쉽게도 모두가 비슷한 모습이었고 그것이 평범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평범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나는 나로 존재하기로 결심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자리에서 상처를 내놓아보고 이야기를 나누니 생각이 전환되고 웅크리고 있던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프리츠 펄스의 게슈탈트 기도문을 읽고 수업을 마쳤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합니다. 나는 당신의 기대에 따라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내 기대에 따라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겠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프리츠 펄스의 게슈탈트 기도문-)


오늘 그림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에 대해 생각하며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로 살아가기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앞으로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내가 되어 다양한 관계들을 회복하고 새로 맺으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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