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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25. 2024

드디어 받았다.

원래 남자는 하지 않는다던 시아버지의 사과

지난 금요일 남편이 휴가였다. 그림책 수업이 끝나고 남편과 점심식사를 했다. 소소한 데이트가 얼마만인지 아이를 낳고 거의 처음이었다. 설렌다기보다는 어색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남편은 내가 초밥을 좋아하는 걸 아직도 기억했는지 초밥집에 데려갔다. 나는 초밥을 좋아하는 데 초밥을 좋아하지 않은 남편과 아이 때문에 안 먹다 보니 남편과도 처음 먹는 것 같았다. 여전히 덮밥을 시키는 남편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나를 생각해서 정한 식당. 매일 외식을 할 때면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은 아이에게 말 걸고 아이의 이야기만 듣던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있자니 정말 어색했다. 나는 얼른 아이가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 제주생활의 계획이나 아이교육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가다 시아버지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는 남편이 시아버지께 사과하시라고 했다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남편은 자기가 한번 더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고 내가 전화를 해볼까 싶어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그동안 못 내던 용기를 내는 모습을 보며 너무 좋다고 했고 무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책임질 테니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또 용기가 났고 식사를 마치고 전화를 드릴 결심을 했다. 식사가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먹은 연어초밥은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고 감동이었다. 이런 날이 오다니. 남편의 배려 덕분이었다. 고마운 사람. 식사를 마치고 아이 하교시간이 다 되어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20분가량 여유가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가는 동안 너무 떨려서 끊고 싶었다. 그런데 참았다.


"어."

"아버지. 삐지셨다면서요? "

"아니. 놀랬잖아.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 데 그런 메시지를 받았으니 놀라지. "

"저는 아버지 성함으로 왔길래 당연히 아버지인 줄 알았죠."

"몰카범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삐졌었어. "

"아이고. 무슨 몰카범이에요. 전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죄송해요. "

"이젠 괜찮아. "

전화 분위기는 좋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이의 근환 이야기를 물으셔서 자연스럽게 전화는 마무리가 되었다. 끊고 나서 보니 사과를 받으려고 전화를 걸었는 데 나만 죄송하다 하고 시아버지의 사과는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우리라. 유치하지만 나는 사과를 받고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아버지. 그런데 여쭤볼 게 있는 데요. "

"응. 뭔데."

"왜 미안하다고 안 하세요?" 엄청난 용기를 낸 나는 순간 매우 떨렸다. 아버지는 망설이시다가 작은 목소리로

"...... 미안해."라고 하셨다.

"저도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 "

옆에 아이가 있으면 바꿔달라고 하셔서 아이와 한참을 이야기하시다 전화를 끊으셨다.


사실 사과를 받으면 통쾌하거나 어떤 싸움에서 이긴 승리감을 느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통쾌함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시아버지와의 벽이 조금은 낮아지고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도 모두 할 용기가 생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생길 불편한 상황들에서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뒤에서 남편만 닦달하고 싸우고 속앓이를 했는지 참 후회스러웠다. 말하고 보니 별일이 일어나지도, 별일도 아님을 알게 되어서 그럴까 더욱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리라 믿고 싶다. 지난날 혼자 상처받고 울며 불며 지내왔던 날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현재가 아닌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런 사실이 스스로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것처럼 상쾌했다. 9년 동안의 묵은 체증이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는 며느리이기전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준비가 되었다. 내가 내의견과 불편한 감정이 들 때면 담백하게 표현하고 알리면 그만인 것이다. 상대의 반응은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닌 것이다. 나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할 필요도 없다. 아님 말고의 태도로 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손절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그들의 말에 따르는 순종적인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으로, 새로운 가족구성원으로 그냥 지내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그동안 시댁은 내 목소리를 들을 이유도, 듣고 싶지도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분들은 자신들을 무조건 수용하고 자신들에게 순종하는 며느리를 원했고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 취급을 하기에 바빴다. 특히 시어머니. 이제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강압적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피할 이유도, 참을 필요도, 침묵할 필요도 없다. 나도 나의 의견과 감정을 말할 자유와 무엇보다 자신이 있다. 나는 그런 며느리다. 그렇게 할 것이다.


한때 남편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래도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분들인데 맞춰주고 부족해도 눈감아 줄 순 없느냐고. 나는 없었다. 지금도 그럴 생각은 없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그들과 관계를 이어나갈 뿐이다. 시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다음은 친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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