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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26. 2024

실례지만 저 좀 안아주실수 있나요?

할머니 품이 그리워서 그만

제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마음 한켠이 복잡했다. 엄마 집에 계신 외할머니의 모습 때문일까. 만감이 교차했다. 마지막으로 뵀던 10개월 전보다 많이 마르셨고 그때는 나를 외손녀라고 알아보셨는데 이번에는 나를 보고 자꾸만 “누구세요?”라고 물으셨다. 그때는 치매가 점점 심해지신 건가 싶어 덤덤했는데 제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할머니는 늘 나에게 “즈그 종자 닮아 성격이 저 지랄이다.”, “나 닮아 똑 부러지는 구석은 있다.”, “저거 지 친할머니 닮아 성격이 요상하다.”, “그만 울어라. 운다고 죽은 네 아빠가 돌아오길 하냐, 서울 간 네 엄마가 지금 올 수 있기나 하냐, 듣기 싫으니 그쳐라.”며 거침없이 이말저말 하셨던 분이었다. 큰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할 때는 늘 주말마다 할머니가 오셨고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 할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나와 동갑내기 사촌은 할머니 양옆에 누워 할머니 냄새를 맡으며 잠들곤 했다. 매일 나는 밤이 되면 엄마가 그리워 눈물이 나곤 했지만 할머니가 오신 날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잠들 때까지 등을 긁어주셨는데 할머니의 손길이 닿을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 또 울뱅이라고 혼날게 뻔했으므로 참았던 것도 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와 드디어 엄마와 오빠와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엄마가 회사에 가고 오빠는 보충수업에 갔기에 방학 때면 나는 늘 집에 혼자였다. 할머니는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함바식당을 하시다 아빠가 돌아가시고는 계약연장이 안되었는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게를 얻어 식당을 하셨다. 할머니 손맛을 잊지 못하는 일꾼아저씨들은 식당에 자주 오시곤 했다. 할머니 식당에 갈 때마다 장 부장 딸이 이렇게나 컸냐며 나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도 많았다. 엄마 말로는 할머니는 밥장사로 삼억이라는 빚을 다 갚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비가 오면 공사를 못해 일꾼들이 나오지 않은 날은 식당 문을 닫고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데리고 동네 마트에 가셨다. 시장 본 것들이 담긴 봉지를 꽁꽁 동여매 머리에 이고 걷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나는 아직도 생생한데 그런 할머니는 안 계시다. 그 모습을 볼 때 나는 생각했다. 하도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녀서 할머니 키가 작아진 걸까. 그렇게 우리 집으로 돌아와 우렁각시처럼 밑반찬이며 찌개며 뚝딱 만들어 놓으시고는 나에게 용돈까지 주시고 바쁘게 돌아가시곤 했다. “아빠가 일찍 죽었어도 씩씩하게 커야뎌. 아빠 없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어. 엄마 말 잘 듣고 엄마 힘들게 하지 말어.” 늘 같은 말이지만 아빠 없지만 씩씩하게 크라는 말을 들으면 늘 눈물이 나왔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아빠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나는 건 지금도 그렇다.


그렇게 당당하고 씩씩하게 자라길 바라는 할머니의 바람과 달리 나는 나약했다. 늘 주눅이 들었고 예민했고 눈물이 많았다. 소심하고 겁도 많아 열 살까지도 엄마에게 분리불안이 있었다. 그런 나를 제일 많이 혼낸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늘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셨고 그만 울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나이가 들어 아빠의 부재보다는 친구들이 중요해지는 사춘기가 되면서 엄마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 시기에는 울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의 넘버원 손자는 큰외삼촌의 큰 아들이었다. 하필 나보다 삼 개월 늦게 태어난. 사촌들 사이에서는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어도 태어난 날로 따져 언니동생을 하던데 우리 집은 달랐다. 거기다 나는 12월생이고 사촌은 해가 넘어가는 데도 그냥 야자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마 큰 외숙모의 정치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손아래시누 아이들이 본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걸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빠른 년생과 함께 같은 학년이었기에 친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 친구가 사촌의 친구였고 사촌의 친구가 내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소꿉친구였다. 어렸을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두발자전거를 잡아주고 밀어주면서 배웠다. 그래서 내게 사촌은 두발자전거다. 내가 큰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할 때는 하루종일 헤어지지 않고 잠들기 전까지 놀 수 있어 좋았다. 가족모임에 가면 우리 아래로 막내삼촌 아이들인 동생들이 있어서 가든 마당에서 놀곤 했다.


우리는 점점 커갔고 공부가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사촌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공부 잘하는 것을 좋아하던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아빠 없이 키우는 데 그런 보람이라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지만. 외갓집이 모일 때면 우리 둘의 성적과 비평준화였던 지역이라 고등학교진학이 항상 화두가 되었는 데 나는 상위권학교에 진학을 했고 사촌은 성적이 좋지 않아 시골에 있는 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 이후 큰 외숙모는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아직도 삑 하면 우느냐, 성격이 지랄 맞는 건 어렸을 때랑 똑같다는 등의 상처 주는 말을 자주 했다. 큰 외숙모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는 "공부를 잘하면 뭐 하냐. 인간이 돼야지."라고 더 세게 상처를 주곤 했다. 사촌처럼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아야 되는 것이라며 나를 아주 형편없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자꾸 그 말을 듣다 보면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이후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사촌은 전문대를 다니다 자퇴한 걸로 안다. 그때까지도 “공부만 잘하면 뭐 하냐. 인간이 돼야지.”라는 말은 외갓집에서 여전히 통용되었고 그 말 듣기 싫어 스무 살 이후로는 외갓집에 발을 끊었다. 할머니를 본 건 내 결혼식때와 엄마가 큰 외삼촌댁에서 할머니를 모셔온 이후였다.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지난날 할머니와 나만의 시간들은 거칠긴 했지만 따뜻했다. 어쩌면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슬퍼 눈물이 났던 것도 같다. 그 사람들이 아빠를 그리워하는 눈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이사를 갔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모를 나이에 그렇게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으로 배웠던 것 같다. 오빠와 나를 보며 가장 가슴 아파했던 두 사람이 있었으니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였다. 친할머니는 나를 보면 항상 울었다. 외할머니는 나를 보면 항상 혼을 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분 모두 마음이 슬펐나 보다. 친할머니는 작년 봄 우리 오빠 생일에 그렇게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던 큰아들 곁으로 가셨다. 이제 외할머니까지 떠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친할머니를 더 이상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경험을 하니 외할머니까지 그렇게 되시면 참 슬플 것 같았다. 그렇게 뒤숭숭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신지라 기억에 없고 최근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니 죽는다는 게, 세상을 떠난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요일 오후 살 물건이 있어 다이소에 갔다. 따님처럼 보이는 분과 예쁜 조화꽃을 들고 계신 할머니가 쇼핑을 하고 계셨다. 순간 친할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봤다.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어색해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가 너무 예뻐서 어떤 게 꽃인지 알 수가 없네요. "라고 말했다. 옆에 계시던 우리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는 따님이 크게 웃으시며 할머니께 내가 했던 말을 전달해 주셨다. 듣자마자 활짝 웃으시니 너무 행복했다. 잠시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시는 할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할머니와 따님께 여쭈였다.


"이렇게 건강하신 할머니를 뵈니 저희 할머니들이 생각이 나서요. 친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친정엄마가 모시고 계신데 치매라서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자꾸만 누구냐고 하세요. 거동도 어려우셔서 안아주시지도 못하세요. 실례지만 저를 손녀라고 생각하시고 저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


"그럼 그럼. 일루 와. 손녀. "

내 등까지 투닥투닥 두드려주셨다. 진짜 할머니가 나를 안아주셨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 차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움과 아쉬움, 속상함이 뒤섞였던걸까. 그렇게 나는 앞으로도 할머니들을 그리워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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