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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27. 2024

또 왔구나 우울아

멍하고 아무것도 못하겠는 그런 날

무기력하고 싶지 않은데 무기력하다. 늘 하던 일을 하고 싶은데 하기가 싫다. 6월 내내 친정일로 너무 신경을 썼던 탓일까. 먼 거리를 1박 2일로 빠르게 다녀온 탓일까. 잠을 수시로 깨고 다시 잠들기가 어려워 약을 바꾼 탓일까. 피곤해서, 체력이 약해서라고 핑계를 대며 며칠을 버텨왔다. 사실 어제는 좋은 시간도 있었다. 제주에서 만난 언니들과의 커피타임. 언제 이런 시간을 가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카페나들이를 했다. 너무 좋았는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그랬다. 평소 같으면 일도 아니게 해 버렸을 청소, 빨래, 설거지도 자꾸 쌓여만 간다. 이제는 안다. 우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익숙하지만 어서 오라고까지는 못하겠다. 으아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불속에서 나오지 못하겠는 이 심정이 참 괴롭다.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서면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텃밭에 오이 상추 열무에게 물을 주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 하루가 간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종일 잠만 잔다. 일상을 놓아버렸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아이에게, 남편에게 미안하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찾아오는 이 무기력과,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 그럴 때마다 괜히 속상하고 예민해지는 나를 남편은 “괜찮아, 졸리면 자면 되지. 그동안 많이 못 자서 그런가 봐. “라며 다독거려 준다. 그러곤 남편은 밀린 빨래와 청소, 설거지도 다 해놓고 아이까지 재운다. 참 미안하면서도 고맙기도 하고 죄책감이 든다.


나의 무기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에너지 관리를 못해서 그런 것일까. 늘 마주하는 무기력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무기력에 항복하는 수밖에.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밖에 없다. 결혼하기 전, 이런 시기가 왔을 때 엄마는 한심하게 날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주변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나를 정의하곤 한다. 어린 시절 주양육자가 중요한 이유다. 나의 우울은 엄마로부터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토요일엔 항상 누워서 잠만 잤다. 항상 아픈 것 같았고 엄마까지 천사가 될까 노심초사했고 엄마를 깨우지 않았다. 엄마가 일어나길 기다리다 배고픔을 참지 못할 정도가 되면 알아서 순대국밥을 시켜 먹곤 했다. 그렇게 외출 한번 하지 못한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면 엄마는 새벽부터 분주했다.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없는 현실을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마음이었으리라 지금은 이해를 해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부담되는 짐이 된 느낌이었다. 옆에서 본 엄마의 삶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다. 아빠의 부재보다 아빠의 부재로 인해 자격지심과 예민하고 우울하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까지 걱정하는 엄마를 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런 정서가 성인기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그런 상황에서 나를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내 안에 우울은 점점 뿌리를 내리고 단단해졌다. 대학교 1학년 외로운 서울자취생활에 번아웃이 와서 휴학을 하겠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계속 다니라고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를 뒤로하고 나는 살려고 휴학계 신청을 했고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투명인간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아직도 엄마는 내가 그때 왜 휴학을 했는지 모른다. 이유보다 그냥 휴학을 한 게 엄청난 잘못이었고 한심한 짓이었다. 나는 서울생활이 외롭고 힘들어 쉬고 싶었던 것뿐인데 엄마에게는 쉼은 잘못이다. 엄마는 늘 자신을 밀어붙이며 살았다. 자신을 밀어붙이는 사람은 타인도 밀어붙인다. 우리도 엄마 자신처럼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내가 그러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을 때 엄마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사고 패턴은 지금도 가끔 엄마에게서 느껴진다.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는 질식할 것 같아 도피성 선교여행을 갔다. 사실 나는 엄마 옆에서 쉬고 싶어 휴학을 했는데 엄마는 곁을 주지 않았다. 나의 자리는 없었다. 떠나야 했다. 어디로 떠나지? 고민하다가 남들은 휴학하고 유럽여행 간다는데 나는 갈 상황이 아니었고 나에게 의미가 없는 시간만 죽이는 여행이 될게 뻔했고 무엇보다 엄마는 번아웃도 용납하지 않는 데 유럽여행이라니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다고 할게 뻔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사실 여행이 문제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 지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교회에 몰두해 있는 엄마의 화를 돋우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는 네팔선교지로 도망갔고 그곳에서도 나의 안전한 자리는 없었다. 선교사님은 대놓고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오는 게 좋다고 하셨다. 그렇다. 선교지는 말 그대로 선교를 하는 곳이지 피난을 가는 곳은 아니니 당연한 말씀이긴 하다. 당시에 함께 지냈던 언니들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거나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지만 엄마 집보다는 나았기에 그냥 설거지와 빨래, 청소를 하고 아이들의 놀이선생님이자 말벗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내고 왔다. 두 달 동안 눈에 안 보이는 동안 딸의 휴학을 받아들였는지 공항에서 본 엄마의 얼굴빛은 밝았다. 당시에도 우울증이었다는 생각이 생생하다. 그 당시 나는 감정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네팔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단단히 고장이 났고 나는 어쩔 줄 몰랐으며 그냥 포기했다. 집에 가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한심한 딸이 되고 싶지 않아 남은 휴학기간 동안 스포츠의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시간만큼은 살아도 되는, 밥값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엄마와는 그냥 완전 홈셰어 사이였다. 종이에 회사 간다 할머니댁에서 자고 출근한다 등 출입 관련 메시지만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아니다. 통보받았을 뿐이었다. 누군가 부모란 세상을 살다가 힘들어서 기댈 곳이 필요할 때 와서 쉴 수 있는 고목나무 같은 존재라고 했는데. 나에게 부모란 사막과도 같았다. 그늘하나 없는.


엄마는 내가 스스로 우울증인 것 같으니 미술치료나 상담을 받고 싶다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완벽주의성향이 강한 엄마는 아마도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도 확실히는 모른다. 우리는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에 알 수 없다. 난 더 깊게 뿌리 박힌 우울증을 떠안고 복학을 하고 조기졸업을 했다. 앞으로 보장된 미래를 병신처럼 박차고 나왔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나의 인생이 더 좋아질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내게 무한지지와 기대를 해주시던 교수님과 주변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나는 떠났다.


그때 이후로 몇 번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 곁을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소중하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지난 10년간 배웠다. 또한 10년도 더 된 우울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칠수록 더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인데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그냥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날엔 여전히 버겁다. 여유롭게 맞이해 주는 날이 오겠지. 지긋지긋한 우울아. 이제 좀 가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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