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어져 있다

작은 쓰담 17. 기억보다 오래 남는 연결을 믿어보기

by 차미레
우리는 기억으로 관계를 붙잡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세상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어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조금씩 쇠퇴해져 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군지 떠오르지 않고,

분명히 읽었던 구절인데도

새삼 새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기억은 이렇게

시간 앞에서 가장 먼저 흐려지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한 경험을 했다.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 그때 그 사람이구나— 하고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니라

톤과 리듬,

말 사이의 공기 같은 것들 속에.


기억력이 희미해진 대신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진 걸까.

인간의 인식은

무너지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붙잡는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기억하는 존재’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요즘 나는

우리가 기억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고 했다.

이리저리

뭔가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자꾸 걸어 나가다 보면

지구가 둥그니까

결국 만나게 된다는

그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어릴 때는, 아니

조금 더 젊었던 순간에는

그 말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져

쉽게 믿기 어려웠다.

인연보다는 우연이,

연결보다는 각자가

더 분명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 저마다의 연결고리가

하나하나 교차되어

결국은 모두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자꾸 그런 생각이 스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잊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뿐,

이미 건너간 흔적까지

지워진 것은 아닐 텐데.


어쩌면 세상은

기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스쳐 지나간 경험들로

조용히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는 말이다.

다만, 예전보다

그 가능성을

함부로 웃어넘기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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