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쓰담 19. 나를 오랫동안 설득해 온 이유 바라보기
어떤 선택들은
잘못이 아니라 너무 오래 설득당한 결과였다.
나는 그 성배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끝까지 들어 올린 이유를
이제야 묻기 시작했다.
‘독이 든 성배’는
대개 눈부시게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주 단정하고,
그럴듯한 말들에 둘러싸여 있다.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당신이 하면 다르니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죠.”
나는 그런 말들에
천천히, 오래 설득되어 왔다.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수십 번의 고개 끄덕임으로.
그 성배를 든 손이
점점 무거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내려놓을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들이 나를 붙잡았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빠지면 누군가는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이쯤에서 물러나면
그동안의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돌이켜보면
그건 용기라기보다
오래 학습된 태도에 가까웠다.
참는 쪽이 옳다고,
버티는 사람이 어른스럽다고,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
결국 인정받는다고.
그래서 나는
아픈 몸보다
망설이는 마음을 먼저 숨겼다.
힘들다는 말보다
괜찮다는 말을 더 빨리 배웠고,
포기보다는 책임을
나의 언어로 삼았다.
독은 한 번에 퍼지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삶의 가장자리를 잠식해 갔다.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설명할 힘도
설득할 말도 남지 않았을 때
그제야 알았다.
이 성배를 끝까지 마시는 일이
나를 증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왜 그 선택을 했는지보다
왜 그 말들이
그토록 오래 나를 설득할 수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그 질문은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해준다.
그때의 나는
그만큼 책임감 있었고,
그만큼 버텨왔고,
그만큼 혼자였다고.
그래서 오늘의 나는
조금 다른 연습을 해본다.
성배를 건네받으면
곧장 들이켜는 대신
잠시 멈춘다.
이 선택이
나를 키우는지,
아니면 또다시
나를 설득하고 있는지.
마시지 않는 선택도
도망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나에게 먼저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