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융 심리학 입문』- 캘빈 S. 홀 (문예출판사,2004)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저녁에 다시 침대에 누울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바꿔가며 하루를 보낸다. 가정에선 누군가의 부모, 혹은 자식. 학교에선 조용한 학생 1, 혹은 3반의 부반장. 회사에선 팀을 이끄는 리더, 혹은 두 달 전에 입사한 인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관객 없이 배우로 꽉 찬 연극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인생이라는 가면극. 이러한 역할 놀이를 실체화하고, 개념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우고 MBTI의 뼈대를 만든 심리학자 ‘칼 쿠스타프 융’이다. 오늘 읽은 책 <융 심리학 입문>은 융의 생애와 그가 세운 심리학적 개념을 요약한 심리학 입문서로 자아, 개인/집단 무의식, 그림자 등의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중 나는 이 글에서 그의 수많은 개념 중 하나인 ‘페르소나’에 집중하여 이 책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조금 생소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는 과거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의미한다.(p.69) 하지만 현대에 와서 페르소나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실제 나와 다른 모습을 의미한다. ‘사회적 가면’ ‘사회적 역할’로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이러한 페르소나는 사회집단이 정해놓은 행동규범이나 가치판단과 관련된다. 앞서 예시로 들었듯 가족 안의 역할, 사회적 직함, 조직 안의 직위에 따라 자신의 페르소나가 생성되거나 변형된다. 이러한 페르소나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한 개인에게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교체될 수 있다.
하지만 가면이라고 불리는 이 페르소나는 우리에게 조금 불쾌하게 들리곤 한다. 우리는 그저 사회의 관습에 따라, 또 상황에 맞는 역할에 따라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자신의 실제 성격을 숨기고 사회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여간 껄끄럽지 않을 수 없다. 본연의 나를 드러내고 사랑하라는 많은 현자들의 말과 상충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대기업에 취직한 청년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회사에 잘 적응하기 위해선 몸가짐, 복장, 행실 등의 개인적 특징은 물론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에서도 그에 맞는 페르소나가 필요하다고 한다.(p.70) 회사의 이념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조직 내에서도 본연의 나를 추구하며 조직을 거부한다면 그 청년은 분명 얼마 못 가 사회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물론, 페르소나와 실제 나의 모습에 너무 큰 괴리감이 있다면 사회적으로도, 일상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나의 성격과 정반대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무대에서 편안하게 연기할 수 없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기해야 하는 페르소나라면 이 괴리감을 점차 줄여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될 수 있으면 페르소나의 모습을 나의 모습에 맞춰가는 쪽으로 말이다.
반대로 페르소나를 곧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부모의 역할에 너무 심취해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다. ‘착한 아이’라는 페르소나에 갇혀 자기 삶을 모두 부모에게 맡긴 아이는 언젠가 망가지게 된다. 그리고 최후에는 부모를 탓하는 비극으로 연극을 마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 인간은 페르소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긍정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페르소나는 고정적이거나, 만성적인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교체되는게 건강하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이상적으로는 어떤 종류의 기만이나 위선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 러나 좋든 나쁘든 간에 페르소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의 사실이며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적절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p.73)
이 글을 마치며 나의 페르소나는 몇 개나 되는지, 또 나의 실제 모습과 페르소나의 거리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생각해 보았다. 분명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페르소나가 존재할 것이고, 내가 끔찍하게 연기하기 싫어하는 페르소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하나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의 페르소나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고, 더 많이 사랑해 줘야겠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마주할 독자분들께도 묻고 싶다. 당신의 페르소나는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