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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찌라시 시대 『백설공주 살인사건』

[소설]『백설공주 살인사건』- 미나토 가나에 (재인,2018)

by 지하


최근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 따위를 공부하다 보니 실시간으로 머리털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인문학을 읽다 보면 안개가 자욱한 호수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듯 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때는 가벼운 소설을 읽는 게 최고다. 평소 잘 방문하지 않는 추리소설 코너를 오랜만에 찾았다. 오늘 집어 들은 책은 미나토 카나에의 <백설공주 살인사건>이다.



XL.jpeg <백설공주 살인사건> - 미나토 가나에 (Yes24)


이전에 미나토 가나에가 쓴 소설 <고백>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만, 머리를 비우겠다는 목표는 완벽한 실패다. 가벼운 추리소설에도 시사점을 남기는 작가라는 것을 벌써 까먹었던 것인가. <고백> 때도 대차게 나의 머리를 흔들더니...역시 섬세하고 날카로운 작가다.


https://brunch.co.kr/@zihayaa/79

*이전에 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에 대한 서평



억측이 만들어낸 끔찍한 비극


소설은 한 화장품 회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프리랜서 기자인 ‘아카호시 유지’는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는 지인이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 살인사건을 취재하게 되는데, 그 방법이 상당히 독특하다. 바로 소설 속 가상 SNS인 ‘만마로’에 일기처럼 자신의 취재 내용을 게시하는 것인데, 이 행동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는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만마로 계정에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내용들을 가감 없이 게시한다. 게다가 그가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간지 <주간 태양>에는 자신의 추측만으로 누군가를 특정하여 범인으로 몰아간다. 개인 SNS의 파급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실제 현실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주간 태양>은 꽤나 파급력이 있는 잡지였기 때문에 미디어에서도 이를 주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당 기사는 사실이 아니었고, 아카호시 유지가 지목한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었다. 소설 결말부에서는 그가 더 이상 <주간 태양>에서 기자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잡지사에서도 독자에게 사과를 전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이미 해당 기사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일상이 붕괴된 상태였다.


책을 깊이 분석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이 책이 단순히 재미를 위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직장 내 빈번한 성희롱,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그리고 미디어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일본 사회를 꼬집은 사회풍자 소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일본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 뉴스가 만연한 시대 : 진실된 정보는 존재하는가?


미디어의 무한한 정보를 뜻하는 ‘정보의 바다’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하다. 과거에는 수 많은 정보들을 빠르게 탐색하고, 배열하고, 습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이제는 정보의 양이 아닌 질이 더 중요한 시대다. 어느 정보가 진짜이고, 어느 정보가 가짜인지 판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된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정보는 무엇이고, 가짜 정보는 무엇일까? 소설 속 기자 아카호시 유지가 자신의 개인 SNS에 올린 정보는 어느 쪽에 속할까? 또, 그가 주간지에 게시한 기사를 보고 독자들은 어떻게 그것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을까? 즉, 정보의 진위여부는 누가 판별할 수 있는 것이며, 정보에 대한 책임은 제공하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 중 누가 더 큰 것일까?


나 역시도 책을 읽고 책에 대한 내용과 감상을 전달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정보를 제공하는 ‘공급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공한 정보가 진짜이냐, 가짜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에는 나의 주관이 들어있고, ‘수요자’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뉴스, 지식을 전달하는 도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어떠한 정보를 완벽히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주관이 조금씩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 속 주간지의 기사 뿐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기사와 도서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에 근접한 정보전달은 가능할 수 있어도, 글쓴이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은 글은 존재할 수 없다. 생각과 말을 글자로 옮기는 그 순간부터 글은 객관성을 상실한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찌라시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힌트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는 스스로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했다.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현상과 본질을 끝없이 의심하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한 말은 의심병에 빠져 세상과 담을 쌓으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특히, 현재 미디어에서 급격하게 쏟아져나오고 있는 ‘진짜’처럼 보이는 정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모든 정보에는 주관성이 어느 정도 개입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시각으로 그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는 말이다.


나는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전’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과연 내가 소설 속 기자가 쓴 내용을 의심하려고 했었을까? 기자가 전해준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을까?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과연 나는 미디어 속 정보를 의심할 수 있었을까? SNS와 미디어의 우주에서 떠도는 수많은 정보먼지들. 무의식 속 마저도 의심을 잃어버린 우리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백설공주를 만들어내고 죽이길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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