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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y 08. 2024

내 이름은 내가 지을래요

#2번째 단상 - 이름에 대하여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또래 사이에서 가장 유행했던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와 Why시리즈, 그리고 마법천자문과 코믹 메이플스토리 등의 각종 만화였다.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창체시간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모두가 도서관으로 우르르 달려가 위같은 만화책들을 골랐다.


나 역시 친구들처럼 만화를 좋아했지만, 내가 먼저 잡았다고 하며 친구들과 다투길 꺼렸고 사실 이미 집 앞 도서관에서 다 읽은 것들이라 굳이 그들 사이에 껴서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의 나는 흰 종이에 까만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책보다 만화책을 더 보고 싶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만화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노란 바탕에 ‘초등학생 수수께끼 100선’이라고 적힌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꽤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책을 펼치니 서점에서 자주 나는 새 책 냄새가 났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아직도 시끄럽게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책을 펼쳤다. 괜한 우월감이 들었다.


20년 가까이 지나 책의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바로 ‘내 것인데 남이 더 많이 쓰는 것은?’이라는 수수께끼다. 문제와 같은 페이지 바로 아랫부분에 버젓이 ‘이름’이라는 답이 적혀있어서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렇구나하고 넘겼지만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니 꽤나 충격적이었나보다. 그날 나는 이유 없이 내 이름을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불렀다.




당시에는 이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ㅊ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학급에서 끝 번호인 거구나. 부모님이 지어주셨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구나. 가끔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칠 수 있는 거구나 등의 인식뿐이었다. 그래서 이름이라는 걸 딱히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칭호 정도일까? 나보다 남이 더 많이 쓴다는데 그럼 남 주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문뜩 그 수수께끼가 다시 생각났다. 작가가 되면 책의 제목과 함께 작가명이 가장 눈에 띌 텐데 내 이름은 어떻지?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내 이름 석 자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름 정도는 남에게 주어도 상관없을 줄 알았지만, 작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작가에겐 이름이야말로 자신을 나타내고 알릴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일 텐데. 자기소개를 제외하면 지금껏 입에 올리지 않았던 나의 이름을 허겁지겁 불러본다. 최OO, 최OO. 어색하다. 너무나도 어색하다. 도저히 날 때부터 함께 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웃기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데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한자로 된 이름에는 이러이러하게 살아가거라 하는 염원이 강제로 담겨있다. 어질고 싶지 않은데 어질어야 하고, 밝고 싶지 않을 때도 밝아야 한다. 부모의 좋은 바람이 담겨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이름대로 살아가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또 하나의 단상.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주니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진 않을까? 내 소설 속 인물들은 자기의 이름에 만족할까?




작가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본명으로 활동하긴 하지만 자신의 별명이나 원하는 이름으로 필명을 설정하기도 한다. 필명. 합법적으로 가명을 쓸 수 있는 이 필명이라는 시스템이 내겐 너무나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이미 해질 대로 해진 본명을 버리고 새 이름을 갖기로 했다. 나의 새로운 이름은 ‘지하’다.


지하는 내 어렸을 적 이름이다. 5살 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어린이집에서 대차게 울고 난 뒤 이 세상에서 없어진 내 예전 이름이다. 물론 나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필명을 지하로 지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이쁘다. 누군가에게 지하라고 불리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한글 파일을 열어 지와 하를 번갈아 입력한 뒤 한자 버튼을 눌러본다. 수많은 한자를 둘러보며 가장 마음에 드는 한자를 고른다.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지는 알 지(知)로, 스스로 이름을 하례했으니 하는 하례할 하(賀)로. 그렇게 정했다. 주민등록본 따위엔 없는 새로운 내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초고가 잔뜩 쌓여있는 내 폴더의 이름은 지하다. 브런치와 블로그, 개인 SNS 등 내 글이 기록되는 곳의 이름은 지하다. 독서토론을 할 때 내 이름은 지하다. 지하라고 내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나의 정신상태는 무장되고 마음은 단단해진다. 지하라고 불리는 지금, 나는 글을 쓰는 작가다. 내가 지은 내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글을 쓰겠다. 이런 생각과 함께 내 두 번째 이름을 불러본다. 지하. 내 이름 지하. 이번 이름이야말로 내가 더 많이 부르고 더 많이 사랑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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