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번째 단상 - 거리에 대하여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다 보면 저마다의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시간.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타는 지하철.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고개의 각도.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적합한 기준을 만들며 편안함을 추구한다. 내게는 거리가 그러하다. 어느 순간 나의 일상에 정착한 거리를 하나둘 적다 보니 꽤 많은 분량이 쌓여 글로 옮겨본다.
글을 쓸 때 노트북과 몸의 거리는 80cm 정도가 적당하다. 의자에 등을 딱 붙이고 한쪽 팔을 뻗었을 때 노트북의 화면이 닿을락말락한 거리. 더 멀면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더 가까우면 거북이처럼 목이 주욱 삐져나오곤 하니까. 물론 최적의 거리로 세팅했다고 해서 더 글이 더 잘 써지는 건 아니다. 글은 원래 잘 안 써진다.
집에서 천천히 걸었을 때 천(川)까지 5분 정도 걸리면 산책할 맛이 난다. 하루 종일 집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면 높은 확률로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그럴 때마다 집 앞 천을 따라 걷는다. 산책은 과하면 안 된다. 적당히 빠른 속도로 설렁설렁 30분 정도 걷다 보면 다시 쓸 힘이 생긴다.
달릴 때는 30분 기준 5km를 뛰었을 때 가장 상쾌하다. 크게 힘들지 않고, 다음 날 무리가 가지 않는 딱 적당한 거리다. 물론 몸이 근질근질하거나, 땀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면 더 먼 거리를 뛰기도 하지만, 그렇게 뛰면 달리기라는 취미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욕심을 줄이는 자만이 더 오래 뛸 수 있다는 게 마라톤의 제1 철학!
집과 도서관 사이의 거리는 도보 15분이어야 한다. 이보다 길면 가는 길에 지치고, 짧으면 마음이 꺾인 순간 곧장 집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 꾸준히 책과 글쓰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다.
통학/통근 거리는 1시간 내였으면 좋겠다. 물론 좋겠다고 말한 건 1시간 내에 도착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 경기 남부에 사는 내게 서울 출퇴근은 지옥 그 자체다.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놀이동산의 줄처럼 길게 늘어선 사당역과 강남역의 버스 대기줄. 꽉 막힌 버스전용차선과 “남은 좌석 : 0석”만 있다면 굳이 공포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소름 돋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타인과의 거리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기준이 모호한 거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디까지 나를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다. 익숙한 사람이라도 서로가 정해둔 선을 넘을까 조마조마하다. 사람과의 거리는 노란 고무줄과 같아 서로 힘을 주면 멀어지고, 힘을 빼면 가까워진다. 관계를 지속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계속해서 고무줄을 늘이고 줄이다 보면 언젠가는 툭하고 끊어진다. 끊어진 고무줄은 다시 이어 붙이기 어렵다.
이외에도 수많은 거리가 내 삶에 존재하지만 이렇게 하나둘 적다보니 강박증세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최적의 거리를 설정했지만, 그 거리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온다. 실패의 원인을 엉뚱한 거리에서 찾으며 삐죽거리기도 하고. 기준은 기준일 뿐. 언제나 정해진 계획표처럼 살 순 없으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사랑해야지. 중요한 건 몇 미터를 갔느냐가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