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째 단상 - 피어싱에 대하여
뚫는 데엔 쾌감이 있다. 막힌 세면대를 뚫을 때도, 바나나맛 우유에 빨대를 꽂을 때도,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 먹먹한 귀를 뚫을 때도 그렇다. 꽉 막혀있는 무언가를 뚫어내면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평소 분출하지 못한 공격성의 발현 때문일까. 찬물로 샤워를 마친 뒤 마시는 캔맥주만큼 시원하다. 아, 이 시원함도 캔의 입구를 뚫어서 그런 걸까나.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내 삶에서 가장 익숙한 뚫음은 피어싱이다. 오른쪽 귓불에 하나. 오른쪽 이너컨츠에 하나 더. 그리고 지난주에 충동적으로 뚫은 왼쪽 콧볼까지.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구멍 외에 추가로 내가 갖고 있는 구멍은 현재 총 3개다. 이외에도 눈썹이나 귓바퀴 등 여러 군데 뚫어보았지만, 3개가 딱 적당히 보기 좋은 수의 피어스라고 생각한다.
처음 몸에 구멍을 낸 건 대학생이 된 해의 여름이었다. 뭐가 그리 쌓인 게 많았는지 갓 성인이 된 나는 하고 싶은 걸 무조건 다 해봐야 하는 1년을 보냈고, 그 리스트의 상단엔 피어싱이 있었다. 대외적으로 주사 같은 걸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반대쪽 엄지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꾹 누르며 표정을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피어싱 가게의 입구는 마치 하데스의 별장 같았다. 실제로도 그런 게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꾸민 요즘의 피어싱샵과 달리 당시 피어싱샵은 대부분 어둡고 음침한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가게엔 언제나 힙합, 혹은 락밴드의 노래가….)
이미 귀에 여러 차례 구멍을 뚫은 친구는 가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무서웠는데 진짜 하나도 안 아파. 여기 안 아프게 뚫기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거든. 아마 주사 맞는 것보다 안 아플걸? 아니 세상에 같은 바늘로 같은 몸뚱아리에 구멍을 뚫는데 덜 아프고 더 아프고가 어딨나. 간호사분께서 몸에 주사기를 꽂으며 이건 안 아픈 주사예요~ 할 때도 너무나 아팠단 말이다. 아,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하고 싶은 것 리스트에 피어싱이 아닌 귀찌로 슬쩍 바꾸면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즈음 친구는 답답했는지 피어싱샵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아, 이 앞은 이제 저승이다.
2평 내지 3평 정도 되는 작은 가게에는 해골 모양을 비롯한 다양한 피어스가 가득했고, 사장님은 역시 하데스를 닮아있었다. (그날의 충격이 어지간히 컸나 보다) 처음 뚫으시네요? 초심자를 반기는 장인의 음흉한 미소가 어찌나 섬뜩했는지. 쫄지 말자는 다짐은 금세 눈물만은 흘리지 말자고 변했고, 차가운 바늘이 귓불을 강타한 순간 그 다짐은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렸다. 눈물이 났다. 꺼이꺼이 까진 아니고, 훌쩍 정도로.
돌이켜보면 피어싱을 딱히 멋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의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해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다. 술도, 담배도, 연애도, 여행도 모두 마찬가지다. 20년간 틀에 박혀 꽉 막혀있던 삶을 새로운 무언가로 뻥 뚫어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에 귀에서 피가 나도, 자그마한 고름이 생겨도 즐거웠던 것 같다.
6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몸에 피어싱이 있는지조차 잘 자각하지 못한다. 새로운 곳을 뚫어도 하루 이틀 지나면 금세 무뎌진다. 새로웠던 모든 것은 이제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것들이 주었던 타성에 흠뻑 젖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오른쪽 귓불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렇구나. 뚫는 쾌감은 무언가를 뚫어버리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새로움을 시작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었구나.
다행히도 아직 인생에서 뚫어보지 못한 일들이 많다. 버킷리스트를 아직 절반도 체크하지 못했다는 건 뚫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이는 내일 아침이 기대되는 이유가 된다. 글을 쓰는 지금. 하루의 절반이 지나갔고, 일주일의 절반이 지나갔고,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남은 절반 동안 나는 무엇을 뚫어낼 수 있을까. 기대되는 절반 이하의 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