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번째 단상 - 상반기에 대하여
0.
재밌었어. 그럼, 안녕
하고 쿨하게 떠나보낼 반년은 아니었다.
조금 더 열심히 해볼걸. 조금 더 많이 웃을걸. 조금 더 깊이 생각할걸.
하는 날들이 많았던 반년이 맞았다.
언제나 ‘더’를 외치던 미련 가득한 반년이었다.
뭐, 어느 상반기가 안 그랬겠냐마는.
1.
이번 연도의 목표는 ‘흘러가기’였다. 목표라는 말보다 방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긴 하지만. 신년을 맞아 새로 산 일기장에 목표라는 단어를 적지 않으면 왠지 죄짓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올해 목표 : 흘러가자. 라고 적었다. 시간은 흐르니 흘러가는 삶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작년엔 멈춰있던 날들이 종종 있었고, 바보같이 물살을 거부하는 날들이 꽤 많아서.
2.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번 해를 보내고 싶었다. 끌림의 물줄기를 거부하지 않고 흘러가고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이 물줄기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좋아하는 물줄기가 맞는지도 자각하지 않은 채 그냥 떠내려갔다. 숨은 쉬지만 죽어있는 삶. 좌표평면에 존재하지 않는 부표 같은 삶이었다.
3.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반년이었다. 하루 세 끼를 제공해 주는 기숙사에 용케도 들어가 아침을 먹는 습관이 생겼고, 그 덕분에 6시 30분에 일어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학점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듣고 싶은 수업으로 시간표를 가득 채워 등교하고 싶은 한 학기를 보냈다. 또 작년 해외 일정 이후 멈췄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새로운 나를 만들진 못했지만, 비워있던 나를 채워준. 딱 반쪽에 어울리는 반년이었다.
4.
'반쪽 잘 채웠으니 하반기엔 완성하자' 같은 다짐은 실현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몸과 마음이 뻥 뚫려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들이부어도 꽉 찰 수 없다. 행복이든, 만족이든, 성취든 뭐든. 계속 채워야만 하는 구멍 뚫린 사람이다.
5.
너무 불쌍하게 쳐다보지 않아도 좋다. 이미 자책하는 단계를 넘어 내 몸뚱아리를 받아들인 지 오래니까. 그리고 아직 반년이나 더 남았지 않았나. 몇 발짝 움직이지 않은 덕에 아직 갈 수 있는 길이 많이 남아있다. 남은 반쪽에 대한 계획은 아직 없지만, 흘러가자는 목표에 맞게 비워두기로 하자. 오늘처럼 끌리는 대로 노트북을 열어 지웠다 쓰고 지웠다 쓰고 지웠다 다시 쓰는, 그런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