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생각의 배신』 - 배종빈(서사원,2024)
낯선 자리에서 스몰토크로 분위기를 깨는 데엔 MBTI만큼 유용한 게 없다. MBTI가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쯤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검사를 해봤지만, 내 MBTI는 변한 적이 없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라기보단 인간 골든 리트리버에 가까운 성격. 전 세계, 특히 한국에선 쉽게 발견할 수 없다는 ENFJ가 내 칭호다. 혼자 있게 된 시기엔 E 성향이 잠시 줄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극단적 P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계획을 즐기지만, N 수치만큼은 언제나 90퍼센트를 넘겼다. 그렇다.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도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생각 중독자다.
멍을 때리는 건 사람을 때리는 것과 다르단 걸 깨달았던 초등학교 5학년. 그리고, 멍을 때린다는 게 상상 속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하염없이 무(無)를 그린다는 걸 인정한 게 최근이다. 버스의 창밖을 바라보며 쌍둥이 닌자나 말벌 군단의 대장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게 멍때리는 행위라고 생각했었는데. MBTI가 유행한 뒤론 그게 아니란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멍때리기의 근본. N은 따진다. 아니 근데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지? S는 답한다. 그럼, 네가 여포의 적토마로 변한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이야?
이렇게나 생각이 많은 삶을 살다 보니 현실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인과 대화할 때 가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머릿속 세계에 파묻히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천장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 번 떠오르면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생각에 깊이 빠져든다. 어제 내뱉은 말은 너무 심했어. 내년에도 아무런 성과 없이 살아가면 어쩌지. 균열이 생긴 이상은 현실의 벽을 두드리고, 결국 이를 까맣게 물들인다.
서점에서 처음 이 책, <생각의 배신>을 발견했을 땐 제목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내용에선 책 제목처럼 배신감을 느꼈다. 상상력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을까. 생각에 푹 빠지는 게 되려 몰입을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는 충격을 넘어선 공포에 가까웠다. 넓고 깊은 생각에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내 모습에 내심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 행위가 나를 망칠 수도 있다니. 그러고 보니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면 무언가에 집중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글을 쓰는 지금도 머릿속엔 석기시대 공룡들이 내 주위에 가득하니까.
'생각에서 벗어나기'는 생각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행위다. 생각 외에 다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일 경우, 우리는 그 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몰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P.56
또한, 저자는 게으름과 무기력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며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게으름은 ‘할 수 있음에도 수고나 고통을 견디기 싫어하는 성향’이고, 무기력은 ‘기력이 떨어져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다. 즉, ‘게으름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므로 의지나 노력으로 달라질 수 있지만, 무기력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85쪽).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이로 인해 기력이 소멸하여 결국 마음을 굳세게 먹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고민을 많이 할수록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신념은 잘못된 것이다”(102쪽), “생각이 행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행동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164쪽) 등 생각의 이면은 기존에 내가 믿고 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아마 ‘생각’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거나, 혼자 생각에 빠지길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생각할 때는 이 확증 편향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는 정보는 취합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다 보니 생각이 편협해진다. 예를 들어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면서 행복한 사람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생각을 확신한다. P.175
저자는 생각에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해 10가지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는데, 그중 내게 가장 적절한 수단은 ‘몸을 움직이기’였다. <시대예보: 호명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개념, ‘시뮬레이션 과잉 사회’처럼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생각에 기반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조금의 리스크라도 보일 경우 도전을 멈춘다. 72:1의 법칙 역시 이와 비슷하다. 자신이 결심한 사항을 72시간 동안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1퍼센트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다’는 내 신념처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시작이 절반이고, 절반이면 나름 성공이니까.
생각에 대한 배신감이 크다는 건 그만큼 새롭게 깨달은 게 많다는 뜻. 어딜 가든 꼭 들고 다니는 애착 노트를 훑어보니 같은 단어가 눈에 띈다. 불안해. 어떡하지. 언젠가는. 나는 왜 항상. ... 1년 동안 같은 고민과 걱정을 끄적이며 상황이 나아진 적은 거의 없다. 노트 속 즐거워 보이는 활자는 언제나 내가 움직이고 도전했을 때이다. 무작정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생각의 본질을 직시하는 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 만약 이 글을 읽은 당신 역시 나처럼 생각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탓하지 말고 꼭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머릿속에서 목적 없이 반복되는 대부분의 생각은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걱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호하기보다 병들게 하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생각과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