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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Nov 21. 2024

이토록 비현실적이고 현실적인 소설『1차원이 되고 싶어』

[소설]『1차원이 되고 싶어』 - 박상영(문학동네,2021)


박상영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흩뿌려진 정체성의 파편을 되찾기 급급했던 2년 전 초봄. 학교 도서관에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으며 그의 경계 속으로 들어섰다. 제삼자의 일기장에 살며시 스며들고, 껍데기 속 농익은 열매를 몰래 훔쳐먹으며 깨달았다. 나의 진실이 너의 거짓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고, 그 정체는 타인이 드러낸 경계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당시의 나는 누군가의 세계에 발을 디딜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좀처럼 혼란스러운 일이니까.


2년이 지난 지금, 과연 나는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을까? 얼마 전 영화로도 개봉된 <대도시의 사랑법>의 원작자인 박상영의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손에 쥐었다. 장편 소설은 부담스러워 자주 읽지 않지만, 400페이지를 넘기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현실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혼재해 가상현실 캐릭터의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었다. 작가 특유의 짙은 분위기 역시 여전했고.


[소설]『1차원이 되고 싶어』 - 박상영(문학동네,2021)


책은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다. 1997년 IMF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사회와 2002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가 공존했던 시기, 커밍아웃에 두려움을 갖는 주인공 ‘해리’는 짝사랑의 대상 ‘윤도’에게 몰래 초콜릿을 선물한다. 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동급생 ‘무늬’는 이를 약점 삼아 해리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고, 말 상대가 되어달라고 하는 둥 그를 괴롭힌다. 해리는 자신이 동성을 좋아하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늬의 요구를 들어주다 점차 그녀와 가까워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 이 책엔 비현실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혼재한다. 윤도를 좋아하는 주인공 ‘해리’와 그런 해리를 좋아하는 ‘태리’, 어쩌다 보니 자신의 비밀을 밝히게 된 ‘무늬’,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나미에’와 태리의 누나 ‘태란’은 모두 동성애자다. 최근엔 SNS가 발달해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유명인들이 하나둘씩 성 소수자임을 밝히며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이 늘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동성애는 수면 아래에 존재했다.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내게 등장인물의 절반 이상이 퀴어인 책 속의 세상은 비현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갈등으로 점철된 인물 간의 관계와 어두웠던 당시의 상황은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주인공 해리의 아버지는 IMF로 인해 사업이 실패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자격지심의 늪에 빠지고, 그의 어머니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광적인 신도가 된다. 어머니의 절친 미라 아줌마의 남편은 도박 중독에 빠져 회사 공금을 횡령한 뒤 잠적했고, 아이 둘을 양육해야 했던 미라 아줌마는 다단계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 너무 비극적인 설정이 아닌가 싶지만, 가끔 부모님이 취했을 때 세기말의 황당한 사건사고를 말해주셨던 걸 떠올리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땐 모든 사람이 어쩐지 붕 떠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미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현실이었다는 사실에 책에 담긴 비극은 배가 되었다.


소설 속 현실성은 어른들의 모습뿐 아니라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해리는 부모님과 친구에게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해 점차 스스로를 잃어가고,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는 윤도는 일진들과 어울리며 해리와의 관계성을 애써 외면한다. 형편이 어려운 희영은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며 자기 자신을 과하게 채찍질하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태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친구들은 그와 엮이는 게 두려워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지독하고도 끔찍한,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현실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타인의 정체성을 이해한다. 누군가는 단단해지고, 누군가는 후회하며 그들은 자신의 경계선을 확고히 그려낸다. 결국 작가는 아직 정체성이 성립되지 않은 이들에게 외부의 바람에도 내면의 불꽃을 지켜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모두가 이기적이고, 어리숙하고, 제멋대로이지만 우리도 역시 그런 때가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의 세상을 더 많이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달갑다. 비현실적인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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