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개인적 기억』 - 윤이형(은행나무,2015)
2003년 겨울. 충청남도 보령시의 4층짜리 다세대주택에서 5살 꼬마는 수화기가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한동안 할머니 댁에 머물렀던 5살의 나는 저녁 10시마다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기 위해 밀크캬라멜을 먹으며 졸음과 다퉜다. 어머니는 수화기 너머로 토끼와 거북이, 콩쥐팥쥐 같은 동화를 내게 읽어주었고, 나는 동화 속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려내며 잠에 들었다. 20년이 지난 기억이지만, 아직도 그날들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망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프로세스지만, 때로는 잊지 못할 정도로 깊이 각인된 기억이 존재하기도 한다. 애써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기억은 우릴 달콤한 추억에 잠기게 하거나, 무자비하게 괴롭히곤 한다. 평소 기억력이 좋지 않아 수시로 메모장을 켜는 나는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만화 속 탐정을 동경하곤 했지만, 아무래도 망각은 저주보단 축복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괴로운 기억을 평생 품고 가기에 인간은 너무도 연약한 존재니까.
기억이 휘발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문다. 윤이형의 중편 소설 <개인적 기억>의 주인공 ‘지율’은 열한 살의 나이에 ‘변형된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받았다. 이는 자폐스펙트럼의 일종인 ‘서번트증후군’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만 완벽히 기억하는 증상이다. 유년시절 지율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고 한 기억도,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반 아이들이 지율을 ‘머신’이라 부른 기억도 지율의 머릿속엔 휘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어머니의 말은 명백하게 새까만 빛깔이었고,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억의 마지막에 칠해진 그 빛깔이 다른 많은 아름다운 빛깔들을 까맣게 삼켰겠지만, 내게 그건 단지 하루의 기억에 불과했고, 결코 그날의 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더럽히지 않았다. (71쪽)
인간은 안정보다 충격에 더 민감한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던 기억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 자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이는 과잉기억증의 소유자 지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춘기 시절을 겪으며 지율은 무의식적으로 내면 깊숙이 숨기고 싶은 기억을 더 많이 떠올렸고, 지율의 기억 속 원치 않는 장면들은 현실속에 투영되었다. 암기력이 뛰어난 능력으로 지율은 의대에 입학하지만, 세상은 지율의 머릿속보다 훨씬 방대하고 거칠었다. 수술용 메스로 타인의 몸을 갈라 나온 피와 살점을 평생 기억해야 하는 지율에게 무던한 충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heart failure'라는 용어를 보면 다른 학생들은 자동적 으로 심부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그것은 우선 heart'와 failure'로 갈라졌고, 한쪽에서는 내 마음을 들뜨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 한쪽에서는 내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부끄러웠던 일들이 기억나면서, 새로 뚫린 두 개의 도로처럼 끝없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94쪽)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지옥이 있다. 그 말은 곧 타인의 지옥에 완벽히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대에서 자퇴한 지율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장기 투숙객 ‘은유’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은유는 일부러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내고 결과만 기억하는 지율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특별함과 평범함에 대한 회의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은유는 ‘비극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기억을 추출해내려고 애쓰는 일을 수치스럽게’(99쪽) 생각했다. 지율의 변형된 과잉기억증을 ‘지옥’이 아닌 ‘능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후, 지율은 담당의로부터 부분적으로 망각을 돕는 약 ‘OB(오브)’의 개발 소식을 듣게 된다. 지율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의 절반은 약을 복용하고, 절반은 과잉기억 상태를 유지한 채 세상을 살아간다. 지율은 은유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브를 복용한다. 하지만 지율과 은유는 어떠한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지율은 은유와 헤어진 이유조차 망각하게 된다.
기억을 붙잡는다는 건 흐르는 강물을 손에 쥐려는 것과 같다. 손에 쥔 순간 그 물은 더 이상 강의 일부가 아니며, 온도와 성질 또한 변질된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율은 기억에 의존해 은율이 읽어준 책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필사한다. 그러나 막상 실제 책과 대조해 본 결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 오탈자가 있었고, 어느 부분은 창작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왜곡되어 있었다. 지율의 망각이 제 기능을 다해 과거가 아닌 현재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잊고 싶어 한 그 집의 세부는 그토록 구체적으로 기억하면서도, 새집에서 그녀와 내가 어떤 계획들을 세웠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 뒤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한다면 그 기억들은 아마 내 두뇌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 웃음도 목소리도 닿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129쪽)
서두에 20년 전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동화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밝혔지만, 막상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면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분명 행복하다고 느꼈어도,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기억은 영원하지 않음과 더불어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잉기억증을 지닌 지율에게도, 망각의 늪에 자의적으로 스며드는 은유에게도, 각인과 망각을 동시에 바라는 우리에게도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완전히 잊혔을까. 희미하게 남아있을까. 왜곡된 채 남아있거나 혹은 적나라하게 기억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타인의 지옥에 발을 디딜 수 없듯, 누군가의 기억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없다.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어떤 형태이든 간에 상대방의 기억 속 한 자리를 채워넣는 것. 기억은 붙잡을 수 없지만, 자국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자 한 내 선택의 결과를 다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여지는 없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망각에 막연한 환상을 품었고, 찾아 헤맸고, 결국 그것을 얻었다. 내 환상과는 달랐지만, 그것은 내게 와서 할 일을 제대로 했다. 한 시절이 그렇게 영원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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