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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Dec 19. 2024

사랑을 원하면서 사랑을 주지 않는 『급류』

[소설]『급류』 - 정대건(민음사,2022)

    

 올해를 아우르는 단어는 ‘하강’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 이유로 소중한 사람들과 일부러 거리를 두었으며, 고독을 즐겼지만 한편으로는 괴로운 이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늪에 빠진 채 몸을 뒤척인 건 밖으로 나오기 위함이 아닌 더 깊은 곳에 닿기 위한 발버둥. 자학을 쾌감으로 받아들인 채 한없이 가라앉았다.


 감정에 이유를 갖다 대긴 싫지만, 이 책을 읽으니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스스로 소용돌이에 빠진 이유는 마음속에 사랑이 부재했기 때문. 사물과 세상과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찾기 힘들었다. 사랑할 힘이 부족했고, 사랑의 자격을 운운했다. 그래서 나 역시 <급류> 속 인물들처럼 소용돌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길 자처했다. 다른 점은 그들은 함께였고, 나는 혼자였다는 점이지만.




[소설]『급류』 - 정대건(민음사,2022)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도담이 해솔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P.32

겉으로 드러난 서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도담과 안정을 바라는 해솔의 비극적인 사랑이지만, 그 안은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의 종착을 찾아 헤매는 성장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도담과 해솔,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신을 웃게 한 것도, 울게 한 것도, 성숙하게 만든 것도 모두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랑의 힘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무시할 수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다. 그 사실이 무서워 나 역시 그들처럼 사랑을 피했나 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모두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지우려 애써 과거를 외면하고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도담은 나의 저녁과 비슷했고,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나의 아침과 닮았다.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입술을 깨무는 도담과 젊음으로 가득한 캠퍼스에서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해솔이 다투는 모습은 내 안의 자아가 충돌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서로를 안기만 했다. 배고파지면 방 안에 있는 것을 먹었고 그 외에는 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 다시 안았다. 방 안이 서로의 체취로 가득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을 채우려는 듯 오래 서로를 안고 있었다. 박탈당했던 행복을 되찾은 것처럼, 품에 안고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다시 잃어버린 것처럼. P.123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손길이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유약한 내 모습을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크기와 선후,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상처의 크기를 견주며 비극적 삶에 앞장섰다. 때 늦은 사춘기에 주위 사람들은 당황했다. 불행 포르노와 피해자 코스프레로 점철된 내 모습을 그들이 사랑하였을 리 만무했다. 사랑을 원하면서 사랑을 주지 않은 내 사랑은 도담과 해솔의 것과는 달랐다. 용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P.195

 억지로 떼어 놓아도 인력(引力)을 거부할 수 없는 관계라면 운명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가끔은 문학이 아닌 현실에서도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잠에 들기 전 머릿속으로 그리는 이상형이 아닌,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서로 끌어당기는 무의적 관계. 그러한 사랑을 찾으려면 우선 올라가야 한다. 더 이상 소용돌이에 내 몸을 맡길 수 없다.




 모든 감정의 중심엔 사랑이 있다. 도담과 해솔의 행복과 슬픔, 기대와 절망 모두 사랑으로부터 비롯됐다. 사랑을 유치하다고 생각한 올해의 내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우울한 내 모습에 취해 슬픔 속에 잠겨 있던 내게도 사과를 표한다. 죽어있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을 마주하는 일. 소용돌이의 밑바닥에 닿았으니,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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