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기에 당신이 있었기에’
배산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습니다. 오늘이 사십년 전 제가 결혼식을 올린 날입니다. 마침 일요일이기도 하여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B교회로 가기로 했습니다. 노는 날인지라 아침 시간에 여기저기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차를 타고 노약자 석에 앉아서 둘러보니 건너편에 오른쪽으로 50대 초반의 등산객이 책을 펼쳐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저두족(低頭族)이 되어 스마트폰을 뒤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는 분명히 이색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도 책을 저 정도로 손에서 떼지 않고 보자고 마음은 먹지만 막상 실행은 잘 안 되는 편입니다.
배산의 목적한 그 교회에 가보니 삼사십 명 정도의 교인이 모이는 자그만 교회였습니다. 11시에 시작하는 정식 예배 15분 전에 남성 두 분이 찬양 인도를 했습니다. 표정이 굳어 있는 육십 대와 오십 대 중반의 남자 신자 둘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한 사람은 장작처럼 뻣뻣이 서 있고 또 한 사람은 유치원생처럼 율동을 하는데 반주를 맡은 오십대 중반의 여신자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고 벌떡 일어나 노래가 늦다고 소리를 치는 순간 제 입은 살짝 옆으로 미어졌습니다. 대놓고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형 교회에서 흔히 보듯이 젊은이들이 기타를 메고 드럼을 치면서 멋있게 인도하는 것보다는 저에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설교는 워낙 청중이 노령인지라 단순하여 알아듣기는 쉬웠으나 조금은 밋밋한 감이 들었습니다. 작은 교회와 대형 교회의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습니다. 전자에서는 좀 더 인간적인 호흡이 느껴진다면 후자에서는 거대한 군중 속에 한 부속품으로 의식적(儀式的)으로 예배를 드린다고나 할까요.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고가 없고 다만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약속이 있다고 빨리 도망치려니 목사님이 밥 먹고 가라고 강권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김치찌개에 백반을 먹었습니다. Y목사님은 저와 동갑이고 서로 인사를 튼 지 일 년반 정도 됩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서글서글한 성격과 항상 웃는 얼굴이 저로서는 부러운 점이었습니다. 저는 표정이 딱딱하고 혹시 남들이 보면 거만하다고 할지 모르는 안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을 다시 타고 신세계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참으로 이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왜 이렇게 종류도 많고 보는 것마다 식욕을 자아내는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를 어린 시절을 보낸 저로서는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세월이 참으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구나하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타코야키 비슷한 것을 사먹고 체중 때문에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으나 오늘만은 예외로 하고 멕시코 사람 같은 상인이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맛이 통상 먹던 것보다는 뭔지 찹쌀떡이 더해진 맛이었습니다.
두 시경이 되어 시립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노벨로 피노티라는 사람의 조각전이 입구부터 있었는데 사람의 인체를 가지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표현을 했는데 잘은 이해가 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라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는 없었고 다만 유명 화가 몇몇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중섭, 박수근, 최영림, 이우환 …… 등의 그림과 일본 사람의 판화를 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앤디 워홀의 판화인지 그림인지가 있어서 속으로 저게 백 억대는 넘을 것인데 싶어서 옆에 있던 여자 경비원에게 무식하게 물었습니다. 저게 진품이냐고 말입니다. 그녀의 말은 그렇다였습니다. 하지만 잘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우환의 공간’이란 데를 갔습니다. 어버이날이어서 관람료 삼천 원은 무료였습니다. 마침 여자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는 중이어서 우리는 살짜기 거기에 묻어 들어갔습니다. 철판에 돌이 한 점 놓여 있고 그것이 정면을 향해 있지 않고 약간 돌아 앉아 있다는 해설사의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썩 석연치 않았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이 ‘평범한‘ 돌을 찾아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살짜기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관계 운운 하는데 꿈보다 해몽이 좋네.”
’점으로 부터‘라는 작품, ’선으로부터‘라는 작품, 그리고 ’바람으로부터’인지 하는 작품들은 보면서 그런대로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캔버스에 기왓장 같은 그림을 하나 그리고는 그것을 점이라고 하고 여백의 캔버스에는 사인이 없었습니다. 해설사 말로는 그것은 캔버스가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고 무한한 공간을 의미한다고 하는 데는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방에 들어가니 바닥에 돌 하나가 댕그러니 앉아 있고 벽에 걸린 캔버스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해설사는 고요한 가운데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기차소리 같기도 하고,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해설사는 그것이 종소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 처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저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삼차원의 공간 속에 있는 작품에 소리라는 것까지 동원한 세계가 신기했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돌아 나오다가 우연히 동영상실이 보여서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동영상은 어느 방송에서 방영한 기록물 같아 보였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이 75세 때 촬영한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5년 전의 기록물로 생각됐습니다. 선생님이 작업하시는 모습, 청년 시절의 물파(物派/모노하)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길로 걸어왔다는 것, (무식하지만 물파라는 것이 서양의 미니멀리즘의 일본식 표현을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고향인 함안 군북의 선영을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어떤 일본 비평가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이우환의 뿌리는 한국이지만 그 줄기와 잎사귀는 일본에서 피었다”라는 말에 저의 머리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일본적인 선(禪), 적요(寂寥), 다도(茶道)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일본 정원 중에는 작은 하얀 돌을 마당에 깔아놓고 거기에 수석 몇 점을 놓아 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일까요. 아무튼 저는 그런 느낌을, 즉 다시 말해 일본적인 이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동영상에서 제 가슴에 남는 이우환 선생님의 말씀이 남았습니다. 딱히 꼭 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작업을 하는 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이다.” 순간 저는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의 생애에서 나에게 귀중한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저 이우환 선생님이 작업하는 저런 시간은 나에게는 어떤 것이 해당될까.’ 그것은 물론 당연히 제가 진료하는 의학이었습니다. 그것을 정말 후회 없이 둘도 없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임해왔는가 물어 보니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10년 혹은 20년 동안 제가 최선을 다해 몰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는 화두를 내게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이동했습니다. 해운대는 적어도 부산 사람에게는 단순한 바닷물과 모래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각자의 시간과 낭만과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오늘 따라 해운대는 너무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모래 축제를 준비한다고 온통 백사장을 파헤치고 산더미처럼 모래를 쌓고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바다 한 가운데는 커다란 작업선이 두 척이 버티고 앉아 바다의 풍경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조선 비치 호텔 옆의 바닷가 바위들에 눈길이 닿으면 항상 그 위로 걸어 가면서 고동을 사먹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제는 바닷가로 접근을 할 수 없게 나무로 된 길로만 동백섬을 돌게 되어 있는데 뭔가 그림의 떡 같이 동백섬의 알짜배기를 맛보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동백섬의 바위 틈에 몸을 끼우고 멍하니 그냥 하늘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그것도 멀리서 걸으면서 쳐다보고 가기만 하라고 하니 나무 길을 타고 넘어 달려가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달맞이 길에 있는 ‘메르씨엘‘ 불란서 식당엘 갔습니다. 저녁 7시가 되어 어스름이 찾아드는 시간입니다. 안내하는 식당의 여종업원이 지정하는 의자에 앉자 멀리 수평선은 뿌옇게 아스라이 보였고 등대에서 이따금 불을 반짝였습니다. 그 옆에 오륙도 섬이 두 개가 조금 어깨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저의 눈의 조망은 백팔십도가 수평선이었습니다. 분위기에 조금은 들떠서 제가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야 내가 태어나서 이처럼 비싼 데는 처음 온다!” 아내는 창피한지 “아니 여기보다 더 비싼 데 갔었잖아요. 청담동 빨레 드 고몽 말예요.“라고 변명하지만 이미 나의 본전은 다 쏟아놓은 셈입니다. 그때도 얼떨결에 갔었고 도무지 사실 저하고는 잘 안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여종업원이 와인을 주문하라고 하니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싸구려를 시킬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없어 보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저도 모르게 있었을 것입니다. 추천해 보라고 하니 맛이 담백하고 상쾌한 것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묵직한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서 속으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하네 하면서도 그래도 듬직한 것이 낫겠다 싶어 후자라고 하니 chianti classico를 가져왔습니다. 절 보고 맛을 보라고 잔에 조금 부어 주는 것을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며 아는 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뭐 보나마나 그녀는 나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겠지요, 장사 한두 번 한 것 아닐테니까요. 요리 코스는 맛은 그럴 듯했지만 정말 ‘기똥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음식 맛 보다는 어차피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전망 때문에 온 것이니 그런 거야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겠습니다.
둘이서 새삼스럽게 연인처럼 속삭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더군요. “사십년이 눈 깜빡할 새 지났구려. 인생이 뭘 이루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테지만 우리에게 손자 둘, 손녀 둘, 아들 둘에 며느리 둘, 여덟이나 남기고 가는 거네. 내세울 것 없어도 모두 무탈하게 사니 그게 복인 거지요.”
‘메르씨엘’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십 주년 행사를 치른 오늘 하루가 다사다난했다고 둘이서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이튿날 J시로 돌아간 아내에게 아무래도 무언가 못다한 말이 있는 것 같아 문자를 보냈습니다.
‘삐꾸가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삐꾸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인데 올해로 16년이 됐습니다). 활력소가 됐다니 내가 고맙지. 나 같은 놈 믿고 40년 동안 격려해 주니 나도 잘 살은 거지. 고마워요.’ 진짜 쑥스럽지만 한 마디 했습니다. 스가노요이치(菅野洋一)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있기에, 당신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어요 슬픔도 기쁨도 … 사랑하는 당신이 곁에 언제나 함께 언제나 당신과 함께 이제부터도 …‘
사십년 만에 처음 해본 소리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겁도 없이 해놓고 후회하는 마음 반, 잘 했다는 마음 반입니다. 제 아내의 답문자가 궁금하다구요? 그것까지 여기서 다 까발리면 저희 수준이 너무 유치해 질 것 같아 못 밝히겠사오니 양지(諒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