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속의 단상들

늙음의 관조

by 현목

비가 내리고 있다. 후두둑 빗물이 차장에 부딪쳐 투명한 점이 되어 사선으로 점점이 붙어 있다. 어느 물방울 화가의 그림처럼 조그만 빗방울의 윗쪽은 빛에 의해 밝게 빛나고 아래쪽은 그림자인지 어둡게 비치고 있다. 멀리 나무들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걸 보니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버스가 달리자 그 점점의 빗방울들이 차창의 표면으로 올챙이가 되어 살아서 움직이며 긴 꼬리를 남기고 있다.


오랜만에 L선생님과 문우들을 인사동에서 만나고 J시로 내려가는 길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이라고 할까. L선생님의 그 열정은 여전했다. 자그만 체구에 언제나 당당한 그 모습에 나는 사실 주눅이 든다. 그 옛날에는 모였다 하면 일박을 하면서 웃고 떠들고 심지어는 치고받고 노상방가(路上放歌)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치기어린 짓이었지만 후회가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지금이 너무 점잖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 옛날이여! 그립지만 지금 하라고 해도 다시는 못할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희망이라고 부르는 뜨거움이랄까 두근거림이 없어지고 신중한 조심성으로 자신의 보호막으로 둘러치고 있다. 지난 세월 희망이 부서진 기억들이 두려운 것이다. 경험이 낳은 씁쓸함이랄까. 아니 그리 비관적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인생을 장밋빛으로만 보고 제 능력을 과신한 탓이다. 지금이 어쩌면 더 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C병원의 건은 너무 과한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 능력의 몫이 왜소하다는 사실이 쓸쓸하다. 하지만 그 또한 누구를 탓하랴. 나의 됨됨이가, 내 역량이 그뿐인 걸. 마음을 비우라는 말조차 허사로 들린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일변할 리가 없다는 걸 오랜 세월에 걸쳐 알아왔기 때문이다. 순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여하히 적절하게 굴신하여 자신을 갈등없이 붙여 가는가에 달려 있다. 남은 생애 그저 담담히 차창에 붙어 있는 빗방울처럼 한 방울까지 다 부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앞일을 내가 또한 어찌 알리요.


갑자기 P사범이 며칠 전에 나에게 보내준 동영상이 생각났다. 검도를 한지 15,6년이 넘지만 나의 대련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다. 내가 나를 본 것이다. 두 가지 놀랬다. 하나는 상대를 치고 내 몸이 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나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라고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하나를 보고는 나는 놀랍다기보다는 나에 대해 실망했다. 상대의 머리, 혹은 손목을 치고는 기세가 바로 빠져버리고 흐느적거리는 것이었다. 검도 용어로 말하면 잔심(殘心)*이 거의 없었다. 나는 어쩌면 나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소극적인 내 성격이 초래한 적은 인연이나마 소중히 여기며 남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이것은 무슨 해탈이나 한 듯이 주절대는 득도의 말은 아니다. 그저 한 인간의 왜소한 노년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이런 것들도 자그만 내 파랑(波浪) 속에서 나를 평안히 하려는 적자생존의 작은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여기에 알맞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관조(觀照), 볼 관, 비칠 조, 빛을 비추어 조용히 보는 것이다. 볼 견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눈으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관도 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되지만 말이다. 격물치지, 그런 경지가 나에게 올까. 언제나 나는 사물의 본질에 닿지 못하고 사이비(似而非)로 살아왔다. 착실한 진지함도 강렬한 에너지도 겸비하지 못했다. 이 버스를 타고 지나가듯이 주마간산으로 해가 저물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공감이라고 누군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이성에 의한, 의지에 의한 공감도 역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희노애락의 인간의 감정이 갖는 삶에서의 몫이 생각보다는 훨씬 큰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맞장구를 쳐주고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다.


노년의 외로움을 실감한 것은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그 많은 젊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어느덧 주류에서 밀려난 느낌이었다.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뭔가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급격히 좁아진 것이다. 그나마 나와 교통할 수 있는 친구들도 서서히 사라지고 한 뼘만큼 남은 세월을 실감할 날만이 오리라. 이제는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극적인 성격은 상대가 나를 왕자처럼 후대하는 것을 바란 것은 결코 아닐지라도 상대의 자극에 내가 이차적으로 반응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마저도 적절했는지 의문이 가지만 말이다.


어느새 차창 밖은 저녁이 되어 회색 구름이 산위를 잔뜩 누르고 있다. 차 속의 천정에 죽 달려 있는 전구의 불빛이 창밖으로 비쳐져 있다. 한 가운데로 파란 불빛이 종으로 달리고 있고 그 양옆으로 주황색과 녹색이 교대로 섞인 등의 잔영이 차창 밖에 그어져 세 줄의 불빛이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 공간은 실재하지는 않지만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저 가상의 공간이 우리의 삶의 진정한 모습일까. 그렇다면 이 버스 속은 무엇인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영원한 천국? 열반? 인간 상상력의 극한? 우연? 불가지론?

그 누구도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믿음뿐이다. 결코 그 누구도 나중을 보증하여 보여 줄 수 없는 믿음! 그래서 그런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그 복이 뭐냐고 따지면 그 또한 한량없는 설왕설래가 있겠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아직은 회색이 더 남아있고 간간히 주황색 가로등이 드믄드문 나타났다가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멀리서 차가운 하얀색 등의 인가에 나타난다. 나를 실은 버스가 도착하는 본질의 끝은 어딜까. 어둠 속으로 인간을 싣고 간다. 조금 더 어둠이 내리면 사물은 어둠 속에 용해되고 윤곽만 남을 것이다.



*잔심(殘心): 검도에서 공격하기 전의 긴장감, 기세가 공격 후에도 방심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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