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고(乘) 치는 머리 한판이다

'기술은 기를 단련하기 위한 수단이다'

by 현목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형광등의 회색빛의 음울함을 가슴으로 들이쉬고 천천히 코로 뱉었다. 20년 넘게 수련한 결과가 오늘의 한판에다가 목을 건 셈이다. 정좌하고 갑상(甲裳)을 허리에다 대고 내 의지를 양쪽에 달린 줄로 힘껏 잡아당겼다. 가슴에 두른 갑(甲)이 조명에 번쩍이자 이름 대신 받은 번호를 쳐다보았다. 면수건에 박힌 감색(紺色) 바탕에 교검지애(交劍之愛)의 글자가 도장에서 보낸 시간이다. 부동심(不動心)의 글자가 새겨진 면수건을 아침에 들었다가 놓은 것은 내 수련의 깊이가 감당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호면을 쓰고 나자 면금(面金) 사이로 세상은 옆으로 길게 납작해졌다. ‘모노미(物見)’ 사이로 시합장의 검우들이 장난감 인형처럼 메뚜기 뛰듯이 펄떡거렸다.


어느 날 오는 죽음의 그때처럼 드디어 나의 차례는 얼굴을 드러냈다. 개시선에 서자 가슴으로 들어온 숨은 아랫배에 내려가서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앞으로 한발 나가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인사가 고개를 숙였다. 검도는 예에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는 경구의 본질 속에 정말 혼을 담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건 딴 게 아니라 후도(後刀)의 마음이고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존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소한 결론조차 그에게는 한낱 휴지처럼 펄럭였던 것이다.


저 아홉 걸음 멀리 서 있는 상대는 남이 아니라고 자기라고 생각했다. 릴케가 「볼프 칼크로이트를 위한 진혼곡」에서 한 말이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극복만이 전부인 것을’. “잘 부탁합니다”라는 인사는 칼크로이트에게 릴케가 전한 말과 다름 아니다.


내가 천천히 자신의 배에 기를 담고 숨을 내뱉으며 나간 삼보 아래에는 시퍼런 낭떠러지가 기다렸다. 상대의 검선과 나의 검선이 만나는 촉인(觸刃)의 거리는 기와 기가 사생결단으로 부딪치는 곳이다. 오금에 적당한 탄력을 붙이고 아랫배에 힘을 넣으니 하체에 실리는 건 삶의 무게였다. 엉덩이의 오목 들어간 부분도 긴장을 집어넣고 가슴은 ‘모나카’ 과자를 반쪽 내듯이 가슴을 펴고 허리를 앞으로 집어넣으니 커다란 산이 배에 닿았다. 상대의 얼굴은 먼산으로 멀어졌으나 그림자처럼 상대의 마음이 어리는 순간을 찾아야 한다. 기합이 검도의 칼날이다. 기합을 목에서 던져서 앞으로 밀어내니 상대의 몸에 맞고 여운이 돌아온다. 상대의 기합인 셈이다. 검도는 혼자서 달밤에 체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의 부딪침과 나의 기의 부딪침이 있어야 비로소 작동이 된다.


나는 왼발로 밀어서 잔발로 나가고 죽도는 상대의 죽도의 바깥쪽을 타면서 약간 종(縱)으로 미는 둥 마는 둥하면서 검선이 상대의 코등이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다키자와켄지(滝澤建治) 8단이 한 말이 생각났다. 상대를 탈 때 제일 중요한 것이 기(氣)이고 기가 비축되지 않고 타서 이긴다는 케이스는 없다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 기라는 개념조차 구두선(口頭禪)처럼 느껴졌다. 오모리엔 마사오(小森園正雄) 범사의 말이 생각났다. 심(心)은 타격하려는 마음의 지각•사려분별•판단이고 기(氣)는 이러한 심이 몸에 에너지로 나타나는 것이고 역(力)은 기술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촉인에서 교인(交刃)으로 나아가고 자신의 타간(打間)까지 나아가는 그 순간이야말로 검도의 진수가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심기력이 발생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몸을 상기시켜 느낌을 가지려 했으나 논바닥에 어리는 구름처럼 잡히지 않았다. 검도에 기가 발현되는 순간 검도는 단순한 칼부림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연결되고 그것은 부동심으로 확장되어 외면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품성을 형성하여 가는 것이다. 이 역시 다키자와켄지 8단의 말이다. 그럼으로써 살아가는 동안 사생관은 기가 살아서 움틀거리는 능력이 생성되리라. 어쩌면 먼 훗날 목숨이 다하는 순간, 기는 죽음을 조용히 직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바위로 버티고 서 있는 상대. 한발 더 잔발로 나가자 상대는 그의 죽도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밀었다. 나는 죽도를 부목(浮木)처럼 띄웠다가 상대의 죽도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상대가 갑자기 죽도를 안팎으로 돌리면서 급하게 들어온다. 으음 상대의 페이스에 걸리면 안 되지 하고 그의 옆으로 물러나자마자 다시 촉인에서 잔발로 왼발로 밀어서 나아갔다. 상대의 죽도를 타고 약간은 밀면서 중심을 뺏으면서 나아간 것이다.


평생 나에게 중심은 무엇이었던가. 살아오면서 얼키고 설킨 산맥을 뚫고 터널처럼 달려온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이제 새삼스럽게 물었다. 태어나서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을 들어가서 부모님이 주는 학비로 살아온 것은 세상물정에 대한 무지였다. 이제사 자식 낳고 살고, 삶의 정상에 가까우니 겨우 저 산 밑 전체의 희미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밥 먹고 배변하고 번식한 것이 생의 중심이었던가. 인간이 만든 상상의 이념 속에서 무언가 중심을 뺏으려고 한 것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모두가 다 꿈꾸는 부와 권력이었다. 그 중심을 뺏으려고 온갖 안간힘을 다 썼지만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였다. 회한과 후회는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낡은 깃발이 이미 되어버렸다.


상대가 죽도를 좌우로 돌리는 것도 상관없이 나는 몸을 더 앞으로 밀어내어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지금 할 일이다. 여기가 일족일도라면 뒤로 돌아서는 것은 낭떠러지다. 이곳에서는 여차하면 한칼에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아직은 결정적인 거리는 아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서 중결(中結)과 중결이 만난 순간은 천길 아래로 몸을 날려야 한다. 이제 중심을 빼앗았으니 치러가자고 하자 몸이 얼어붙고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상대는 구름처럼 순간 물러서서 더 멀리 있어 보였다. 나의 공세는 그에게는 스쳐지나가는 헛바람이었다. 상대는 나의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벌써 머리 위로 죽도를 날려버렸다. 거착(居着)이 나의 무릎을 꺾어버렸던 것이다. 역시 상대는 나보다 고수였다.


나는 다시 기합을 넣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해 주는 좌절을 깨뜨리는 소리였다. 나의 한계는 언제나 고갯마루에서 좌절했다. 20년 쯤 지나니 자신의 능력에 굴복하기 시작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흥분하여 변칙을 쓰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용기가 아니라 더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촉인에서 다시 조금씩 잘라서 기를 일으켜 세우고 중심으로 비비고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의 인생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이 무위로 된다고 하더라도 성의껏 중심을 뺏은 흔적은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내가 성취한 중심 뺏기는 의학도 아니고 부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 허전함을 채울 것은 공허뿐이었다. 돈은 좋아했지만 돈을 버는 데는 피를 쏟지도 않고 잡기를 쫓아 허망한 나비처럼 돌아다녔다. 돌 주우러 구랑리 농암천을 오르내리고, 난 캔다고 산으로 돌아다니다가 여의치 않으니 비싼 돈 주고 난 사다가 다 죽이고, 서예한다고 먹물깨나 흘리고, 시 쓴다고 허영에 자비(自費)로 시집 내고 우쭐거리고, 주제도 모르고 신춘문예 응모했다가 낙선하고. 돈이 없으면 인생은 우중충해진다고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가 한 말이 빈 말은 아니지만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니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가 죽도를 만나 20년 동안 한다고 했지만 언제나 어정쩡한 나의 실력에 나오는 것이 한숨뿐이었다.


일족일도를 지나서 다시 칠 수 있는 거리로 들어가자 나는 다시 세상이 가벼워 보였다. 내가 앞으로 오른발을 내니 드디어 상대도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 여기가 승부의 갈림길이다. 몸과 마음과 전존재를 투척하고 나서 무화함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배치기하듯 단전을 내밀고 왼발의 발가락이 발의 본체와 접하고 있는 부분을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상체가 산이 절개되듯이 갈라지며 앞으로 쏟아졌다. 그래 됐어라고 하는 순간 하늘이 가볍고 파랬다. 이제는 타고 머리 한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허리에서 나는 퍽 소리는 가슴 깊이 쏟아지는 선혈이 낭자한 핏자국이었다. 나는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무너지는 발걸음을 침착이라는 가면을 씌워 왼발을 재빨리 끌어당기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의 인생처럼 손에 잡힌 중심은 아침에 사라지는 안개였다. 그나마 중심을 뺏고 보잘 것 없으나 자신이 가진 기력을 다 던졌다는 사실에 위안이 되었고 어떤 면에서 마음이 편안했다. 온몸에서 썰물처럼 무언가 빠져 나가고 썰렁했다. 바람도 없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개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은 허공을 밟고 가는 것이었다. 패자이지만 몸의 기가 빠져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패자에게도 품위와 풍격(風格)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다짐하자 아랫배가 가득 차오고,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자 상대가 밝은 햇살 아래로 보였다. 상대의 눈을 보고 인사를 하는 내 귀에 새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라고, 황혼녘에 아직도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타고 머리를 치지는 못했노라고. 아직도 건너지 못한 내 몸의 반짝이는 기의 강을 아득히 바라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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