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

‘삼각형 지키기’

by 현목

결혼 사십주년을 맞아 우연히 부산 시립 미술관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의 한 켠에 다른 건물로 따로 마련되어 있는 ‘이우환(李禹煥)의 공간‘ 속에 있는 작품들을 관람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신문지상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정도이고 사전 지식이 없는지라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 다음날 당장 그분의 책(『여백의 예술』 『양의의 예술』을 사서 읽어보니 단순히 화가나 조각가라기보다는 철학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서울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의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무한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하는 그분의 말씀에 아직은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 어떤 매력을 던져 주는 면이 있어서 시간이 나는 대로 나름대로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그 ‘이우환의 공간‘ 속에서 본 영상물에 나오는 선생님의 말씀이 저의 뇌리(腦裏)에 오래 동안 남았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작업을 하는 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제 아내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당신한테 생애 가장 귀중한 시간이 무엇이었냐고요.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자기도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가 집에 오면 밥 해먹이고 그애들과 함께 웃고 떠들 때라고 했습니다.

이제 칠십을 눈앞에 두고서 새삼스럽게 제 인생을 반성한다고 호들갑을 떨 생각은 없으나 그래도 마음에 뭔가 걸려서 저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육이오 사변 전에 이북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북 사투리가 창피해서 밖에서 같이 다닐 때에는 멀리 떨어져서 걷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제 어머니가 저를 업고 얼어붙은 임진강을 한 밤중에 걸어서 오셨다는 말씀이 기억날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B시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C의과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저런 백일몽을 꾸었습니다. 병리학을 전공해 볼까, 정신의학에도 관심을 가지며 우왕좌왕 하다가는 나중에는 생활에 쪼들려 결국 지금의 전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아쉬운 선택이었던 것을 지금에서는 후회가 되는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는 무언가 진득하게 파고 들지를 못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안목도 장래에 대한 목표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를 지내는 노무자처럼 지내온 것 같습니다. 너무도 일관성이 없이 그때 그때 표변한 셈입니다. 의과대학에 남아서 학자를 지향한 것도 아니고 겨우 대학을 나와서 개업의로서 돈벌이하는 데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저의 온 정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면 정말 돈 버는데 집중해야 하는데 돈은 좋아하면서도 정작 돈벌이에는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사는 돈만 벌면 땅을 사두어 많은 축재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오늘에 와서 보면 의사로서 성공한 축에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하기야 ‘어정쩡’이란 말이야말로 저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외도가 시작된 것이 1980년대 초인 것 같습니다. 전문의를 따고 경북의 S시에서 봉직의로 있으면서 근처의 강에서 돌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조그만 받침대에 산수를 닮은 돌을 얹어놓고는 ‘수석’입네 하면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감상에 젖었습니다. 하지만 돌을 찾으러 다닐 시간도, 실력도 충분하지 못하니 책이나 사서 읽고 결국은 수석집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돌을 사서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잔소리도 있고 제 배포도 크지 못하여 아주 고가는 못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4,5년 지나서는 시들해졌습니다.


돈은 빨리 벌고 싶어서 없는 형편에 E시에다가 개업을 했으나 워낙 영세하게 출발하여 경영이 잘 안 되어 시체말로 망한 거지요. 그래서 친구가 있는 지금의 J시로 와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E시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서예를 계속 지속했습니다. 열정이 있을 때는 한달에 한번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E시의 S선생님에게 사사도 받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것도 한 10년 되고서는 그만 두었습니다. 이 짓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난을 캐러 다닌다고 야단법석을 하다가 수석처럼 난집을 출입하면 또 사서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내로부터 싫은 소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많던 난을 다 죽이고 제 집에 한분도 없습니다. 평생 아내로부터 듣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귀가 너무 얇아서 탈이야. 고상한 것은 다 하려고 하는구려.


팔십년대 중반부터 이천년까지 골프를 쳤네요.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필드에 나가서 내기도 하면서 주말을 즐겼습니다. 내기에는 워낙 재주가 없어서 대부분 돈을 잃는 편이었습니다. 내기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혼자서 안 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짓도 한 십년 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게 전환점이 되는 2001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학 시절부터 막연히 검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한 십 년 개업의를 하면서 분만을 받았는데 거기서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 검도도장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에서 본 시 교실에 들어가서 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대학 다닐 때는 지금처럼 다양한 동아리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시 동아리에 들어가서 시를 짓네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적이 있는 그 여파라고나 할까요. 나름 열심히 참여하면서 기어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저도 시집을 하나 갖고 싶어서 실력도 안 되면서 못난 시들을 주워 모아 ‘자비’로 시집을 2004년에 냈습니다. 오늘에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울 정도입니다. 허영에 이상한 짓을 한 거지요. 지금 같으면 택도 없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은 안 하려고 합니다.


2004년부터 『검도일본』이라는 잡지를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제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줄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일본말로 된 글을 읽으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전을 보면서 번역을 하여 읽어보니 머리에 잘 들어왔습니다. 일본어 공부도 할 겸 틈만 나면 번역을 해서 모아두었습니다. 그짓을 한 십이 년 정도 하니 그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게 됐습니다.

1984년 어머니가 쉰 중반에 돌아가게 된 것을 계기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날라리’ 신자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잠깐 주일에 예배보고 일요일에 골프 약속이 잡히면 당연히 공치러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새벽이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3시 50분에 일어나 교회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기독교 서적도 많이 읽었습니다. 제 컴퓨터에 독서한 것이 요약되어 저장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2015년부터 B시의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2014년 2월 지금의 L소설 교실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려고 한 1년은 그 교실의 사이트를 들락거렸습니다. 과연 제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역시 저의 변덕이 주효한 것입니다. 미국 아틀랜터에 있는 제 아들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의 반스 앤 노블이라는 서점엘 갔습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 시집 코너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속으로 너무 놀라 야, 책의 흐름이 시가 아니라 소설이 주류가 아닌가, 혹시라도 내가 글을 써서 로또라도 잡는다면 시를 지어서는 택도 없겠는데…… 하는 생각이 이 소설 교실에 들어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후회는 하고 있습니다. 너무 일확천금을 노린 것이 제 주제를 파악 못한 탓이라고 말입니다.


여기까지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결혼한지 40주년 되는 날에 ‘이우환 공간’에 가서 만난 이우환 선생님의 말씀 중에 ‘내 생애에서 가장한 귀중한 시간’이 무엇이었느냐는 생각에 다다르자 저는 정말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 적어도 2001년 이후 제가 시간을 가장 많이 쏟은 것은 다름 아닌 검도였습니다! 저녁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도장에 나가서 한 시간반 이상씩 수련을 하고 거의 매일 12년 이상 검도잡지, 단행본, DVD를 번역했습니다. 질적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저의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했다는 것을 이우환 선생님의 말씀과 만나면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검도가 제 생애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년 음성에 있는 중앙연수원에 연수받으려고 그 먼 길을 다녀오는 이유가 뭔지 새삼스럽게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거지요. 그러나 저는 막연하지만 제가 죽을 때까지 다른 건 몰라도 이 검도만큼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놓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이 근자에 검도를 십오 년 넘게 해오면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검도하는 것 자체에 회의에 빠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해왔는데도 도무지 검도의 맥락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도장에 가서 사람들과 대련하여 제가 타격을 하여 성공하면 기분이 좋고 얻어맞으면 기분이 찜찜하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흘러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그 반복에 미혹이 생긴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검도는 러닝 머신을 타고 달리다가 땀이 나면 운동 잘 했다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이치가 어떠하든지 남보다 스피드가 빠르면 타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스피드만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검도에 이합(理合)이 필요합니다. 저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동안 수많은 검도에 관한 글을 읽고 이론은 알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생기지 않아 결국은 스스로 헤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동안 ‘학이재(學而齋)’―제 서재 이름이기도 합니다―란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해 오다가 2015년부터 ‘천검회(辿劍会)‘란 이름의 블로그로 검도 관계 글만 따로 모아서 정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고민하던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 단서에 따라서 딱 일 년간만 해보고 희망이 비치면 검도를 계속할 것이고 아니면 접고 다른 길을 가든지 아니면 검도를 해도 그냥 땀이나 흘리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요량입니다.


『검도일본』 2008년 8월호에 실린 우치다 노부유키(內田信之)교사 7단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분은 죽도의 자루를 잡은 왼손과 왼 팔꿈치와 오른 팔꿈치가 이루는 삼각형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대를 칠 수 있는 거리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 들어가는 행위를 검도에서는 공세(일본말로는 세메[攻め])라고 합니다. 인간은 상대방이 자신을 치면 본능적으로, 혹은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든다든지 해서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언제나 임시변통이 되고 제자리 걸음이 되고 맙니다. 그게 바로 저의 이제까지의 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좀 전에 말한 그 ‘삼각형’을 지키면서 상대가 치면 저의 치려는 기분을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얻어맞으라는 것이 우치다 노부유키 교사 7단의 지론입니다.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상대방의 움직이는 순간이 보이기 시작하며 그것이 바로 상대방의 틈이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바로 타격하는 것을 검도에서는 이합(理合)이 맞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검도 수련 십오 년이 넘으면서도 이것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때 그때 되는 대로 타격을 하고는 맞으면 맞고 안 맞으면 안 맞는 걸로 알고 지내왔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한 셈이고 이 삼각형을 유지하는 수련을 일 년간 해보고 그 결과를 보자는 것이 현재의 저의 심경입니다.


이 ‘삼각형 유지’의 지론에서 갑자기 저의 생각이 비약한 것은 성경의 욥기의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은 한 평생 다 고단하게 삽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유한 사람은 그 사람 나름으로 다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생 살면서 이 고난을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의 일생은 남들이 보면 그다지 굴곡이 없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 나름의 풍파가 있어 왔고 그에 따라 고민도 했습니다.


석가모니도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하여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여 득도를 했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가 아니므로 그 깊은 뜻을 잘 모르고 대충 피상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이든 불교 신자이든 아니면 일반사람이든 모두가 종교의 교의에 의해 혹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누구나 고난을 당하면 당황하여 자신이 처리하려고 허둥지둥합니다. 검도로 말하면 상대가 타격을 가해 오면 본능적으로 손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각형 지키기‘가 무얼 의미합니까? 모르긴 하지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불교라면 예컨대 삼법인(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일 수가 있고 기독교라면 저는 믿음과 순종이라고 보았고 유교는 막연히 경(敬)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일 년반 동안 저는 성경의 욥기를 N교회의 P목사의 34회나 되는 설교를 듣고 필기하고 묵상해 봤습니다. 욥기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문학적 기록처럼 보입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윤리도덕적으로 위반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설정이 그랬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식을 다 잃고 전재산을 다 날리고 악질의 피부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마누라는 네가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악담하고 떠났습니다. 그때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잘못했으니 하나님이 벌 주신 것이다. 말하자면 너의 지금 상태는 인과응보의 결과라는 거지요. 하지만 욥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태어나서 이제껏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찾아가 온갖 불평을 하고 따집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보면 이런 인과응보가 아닌 것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그때 우리는 흔히 하기 쉬운 말로 그것은 지 팔자다, 운이 없어서 그런 거다, 라고 적당히 둘러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너무나 의외이어서 정말 무슨 대단한 비법을 기대한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답마저도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이고 애매모호합니다. 하나님이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합니다. 욥아 네가 잘 난 게 뭐 있냐? 너는 대장부처럼 행동하라. 그게 다입니다. 그러나 욥은 마침내 재와 티끌 속에서 회개한다고 항복합니다. 그게 끝입니다. 그 속에는 직접적인 답은 없습니다.


그 답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성실하심을 믿는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도 신자들이 그저 믿음 믿음 하는 소리나 ‘믿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면 속으로 오바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눈살을 찌푸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검도하는 사람이 이 ‘삼각형’을 지키듯이 기독교는 믿음과 순종으로, 불교라면 삼법인으로, 유교라면 경을 유지하면서 세상이 주는 타격을 얻어맞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의 이치, 세상의 지혜, 삶의 의미가 보여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얻어맞는 것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99프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해도 우리의 몸에서 저절로 손이 올라가버립니다. ‘삼각형’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해결하려고 허둥거리고 지쳐서 나가떨어집니다. 그제서야 ‘삼각형’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삶의 어려움입니다.


우연히 ‘이우환의 공간’에서 만난 선생님의 말씀이 제 인생을 한번 더 돌아보게 만들었고 또 막다른 골목이 이른 저의 검도의 수련에 한 숨통을 트이게 하는 지론을 마침 맞이하면서 선생님의 생각과 합치하며 새로운 삶의 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랜 저의 검도의 수련 중에서 이제 남은 인생에서 제가 가장 귀중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할 것은 이 ‘삼각형 지키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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