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의 허와 실

자연의 크기와 힘

by 현목

한 4년 전부터인가 정규 방송을 보지 않게 되자 이리저리 케이블 티비 채널을 틀다보니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재방송 프로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이 새롭게 보이고 나 자신의 반성도 되고 하여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것도 한 동안 지나다 보니 식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포맷(format)이 너무 틀에 박혀서 틀면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갈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식사하는 모습, 산에 약초(도라지, 더덕, 둥굴레 등등)를 캐러 올라가고, 자신이 산에 왜 올라오게 되었는지의 사연, 대충 이것이 큰 줄기인데 여기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고 인물만 다르다뿐이지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는 대충 같습니다.


먹는 거야 산속에서 별개 있겠는가 싶지만 어떤 때는 어울리지 않게 돼지라든지 닭이라든 고기를 가지고 지글지글 구워서 먹는 모습을 보면 당연히 거기서도 먹고 살아야겠지만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혼자 산다고 먹는 것이 부실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조그만 동굴에 효소라든지 된장이라든지 준비해 놓을 것을 보면 규모가 예상보다 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심심산중에 와서 혼자 살면 그저 비바람만 막는 정도의 주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생각밖에 혼자 사는 사람 집치고는 규모가 큰 것을 종종 봅니다. 심지어는 도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집과 그 집도 한두 채가 아니라 대여섯 채를 가지고 번듯한 연못까지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을 보면 저런 정도의 성의와 집착이 있다면 세속에서 못살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산에 올라온 사연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이 저 세상에서 쉽게 말하면 생존경쟁에 패해서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피신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았습니다. 개중에는 건강 때문에 올라온 분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산속에 들어오는 경우도 사연을 들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없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자기의 아내와 자식의 생계를 ‘나 몰라라’ 하고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이 풍진 세상에서 모두 험난한 생존경쟁 속에서 마음을 썩이면서 살고 있고, 그 대부분은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걸 팽개치고 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항상 남았습니다.


‘자연인’으로 나온 분들을 많이 봤지만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S대 출신으로 학생운동 하다가 해외로 나가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경우를 당하고 나서 귀국하여 ‘자연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거지도 허술하고, 밥 먹는 것도 된장국에 나물 같은 반찬 한두 가지로 족했습니다. 그 많은 약초에도 별 관심없고 가다가 버섯인가 발견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가져가겠다고 던져놓고 산꼭대기의 바위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을 보다가 내려왔습니다. 집에서 책보는 사람은 딱 이 분 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칸트의 3비판서를 해설하는 책들을 읽다가 ‘숭고미’를 발견하자 바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생각났습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인식하느냐는 것에 대해 쓴 겁니다. 대상을 공간과 시간의 지평에서 감각으로 포착한 것을 상상력에 의해 지성의 네 가지 범주(질, 양, 관계, 양태)에 일치시켜서 대상을 알게 됩니다. 『실천이성비판』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이성을 가지고 도덕법칙을 세워 스스로 명령에 복종하는 메커니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판단력비판』은 심미적 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취미판단과 숭고판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앞의 대상을 본 감각자료들을 상상력에 의해 어떤 지성과 일치시킬 때 느끼는 쾌·불쾌를 취미판단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숭고판단은 거대한 자연의 크기, 힘에 압도되어 상상력이 지성과 일치하지 못하고 이성과 작동하여 사유를 낳게 됩니다. 그러한 사유는 신, 영혼, 자유 같은 형이상학이라고 하지요.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 심심 산속에 들어와 있어도 ‘자연인’은 우리와 같은 환경이 아닙니다. 전기도 없는 캄캄한 집 속에서 잠을 잔다면 그에게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그저 한낱 먼지 같은 자신의 존재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 아래의 산하를 바라보면 자연의 크기와 힘에 압도되어 인간도 자신의 발밑을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와 같은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매일 자연 앞에 나아가 그가 경험하는 것은 숭고체험입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그렇게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느꼈고 갈등했던 재산, 권력, 건강, 생명에 대해 반성하고 그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여유와 평안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자연인이다’의 삶의 동력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편안하고 즐겁고 만족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적 수준에서는 정당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 속에서 부대끼며 살면서 자신의 도덕적 존엄을 세워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본다면 ‘자연인’이 산중으로 들어온 이유는 이해는 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 없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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