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시인과 개인적인 인연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복 시인’ 하면 제 마음에는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그분의 고향인 경북 상주입니다. 제가 1982년 ‘레지던시’를 마치고 상주에서 봉직의로 3년 근무한 적이 있어 ‘상주’ 하면 저로서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다른 하나는 2004년 『모호한 중심』이란 시집을 자비 출판했을 때였습니다. 저를 지도하신 선생님이 시인 협회에서 가져온 시인 주소록을 주면서 시집을 우편으로 시인들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똥오줌을 못가릴 정도여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저에게 회답하여 주신 분이 별로 없었는데 답장을 주신 분이 이성복 시인이었습니다. 그때는 속으로 정말 놀랬습니다.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는 2002년부터 2015년 동안의 이성복 시인이 시 창작 강좌 수업한 내용을 아포리즘(aphorism/驚句) 형식으로 정리한 책들입니다. 내용이 서로 겹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젊어서 시인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졸업하고는 강단에서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신 분이 시론을 경구로 정돈한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교수로 하는 일이 논문 쓰고 논문 심사하는 일이니 시론쯤 쓰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아포리즘만 나열한다는 게 의외였습니다.
아포리즘을 정리한다고 해도 나름 범주가 있었습니다. ‘언어, 대상, 시, 시작(詩作)’ 등이 그것입니다.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을 여러 군데서 발견하였으며 제가 이제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이 시론에서 제가 발견한 시의 특성들과 그 특성에 대해서 이성복 시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제가 받은 감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본 시의 특성으로는 아홉 가지 정도가 있었습니다.
1 시의 주인공은 언어(말)이다
‘시는 일차적으로 언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시는 드리블이에요. 전적으로 말을 몰아가는 거지요.’
‘시는 말의 춤이에요. 시의 쾌감은 말의 마찰과 낙차에서 생겨요.’
‘시는 언어를 변경하고 굴절시킴으로써, 관념에 싸여 있는 사물을 구해내지요.’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받은 것이 ‘시는 언어(말)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를 쓴다고 하면서 사실 언어 자체에 신경을 쓴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언어 자체의 묘미를 발견한다든지,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시상(詩想)으로 떠오른 감정이나 의미를 이미지화하느냐에만 거의 정신이 쏠렸습니다.
시의 시작(始作)은 감정이나 의미보다는 음악처럼 리듬이나 가락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 자체를 가지고 놀이를 합니다. 물론 시의 발생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겠지만 시의 주인공이 언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에 있어서 언어(말) 자체의 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2 언어(말)를 비틀어라
‘말을 비틀어야 의미가 우러나요. 시답잖게 써나가다가 획 낚아채는 구절이 있어야 해요.’
‘시 쓰는 건 말 등에 올라타고 고삐로 방향을 틀어주는 것 같아요.’
시를 아주 능숙하게 잘 쓰면 몰라도 저는 대개 시상이 떠올라도 한두 줄은 그럴듯하나 나머지는 그저 설명하는 진술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는 시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이때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핵심적인 이미지를 찾아서 언어를 비틀어야 합니다.
능수능란하게 언어를 비틀 수 있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나 적어도 시가 되려면 급소가 되는 곳에서 언어를 한 번은 비틀어 주어야 합니다. ‘비튼다’는 말이 사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본다면 적절히 답변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식한 제 생각에는 무언가 시적으로 느끼게 하는 언어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시적’이란 무엇이냐고 다그친다면 제 실력이 금방 탄로날 것 같습니다만.
행과 행 사이의 함축적 의미, 분위기를 띄운다든지, 비유법, 강조법, 변화법 같은 수사법을사용하는 경우를 말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은유법을 가장 잘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재능이 없는 것을 항상 탓합니다만 그것 역시 노력으로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3 대상에 집중하라
‘그냥 대상을 핑계 삼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뿐이지요.’
‘우리는 대상 자체를 만날 수 없어요. 대상에 대한 관념을 만날 뿐이지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말하도록 해야 해요.'
우리는 대상을 보면 자신이 대상에 대해 탐구한 내용을 쓰려고 합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대상을 핑계 삼아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만 우리가 대상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만 하면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일본의 이토 케이치(伊藤桂一)는 사물을 보는 방법을 다섯 가지 정도로 설명합니다. 사물의 외면, 사물의 내면, 사물의 감정, 사물과 주변 관계, 사물의 영혼이 그것입니다. 이 정도로 사물을 탐색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대상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면 더 넓은 세계가 열립니다.
대상이 스스로 말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을 듣고 글을 쓴다고 하면 좀 더 객관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의 사고를 대상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 되지만 대상 즉 사물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면 우리의 집착,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좀 더 여유 있게 사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물이 말하도록 하는 가장 비근한 예가 사물시가 아닌가 합니다. 사물시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형식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프랑시스 퐁주가 있습니다.
4 징검다리, 보폭을 크게 하라
’시 쓸 때는 징검다리 건너듯이 해야 해요.‘
’물에 던진 돌의 파문을 연결하는 방식이 시예요.‘
’말을 이을 때는 일단 보폭을 넓게 잡으세요.‘
시는 읽을 때는 우선 불편합니다. 따라서 읽는 사람이 인내하지 않으면 읽기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가 문장들이 산길을 가듯이 그저 자연스럽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도약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힘이 듭니다. 대신 그만치 쾌감도 동반될 수 있습니다.
산문은 문장이 논리에 맞게 이어지기 때문에 크게 저항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쑥쑥 앞으로 나아갑니다. 반면에 시는 보폭이 크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시적 긴장을 일으킵니다. 그런 긴장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런 긴장 때문에 읽기를 중지하고 더 이상 시라면 상대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시를 읽을 때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시에 통하는 말은 아닙니다. 김소월이나 박목월의 시를 보면 말들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과 행의 보폭이 넓기 때문에 우리는 그 넓은 보폭에서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5 아픔
’시가 안 되는 건 그 안에 ‘아픔’이 없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쓰고 나서 많이 아파야 해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시 쓰기는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이성복 시인의 이 책들을 읽으면서 쇼크를 받은 부분도 여기입니다. 시를 쓰는데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시는 극지(極地)의 산물이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대표적인 극지의 시인은 이육사라고 했습니다. 이육사에게 시란 자신이 목숨을 건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그저 취미로 기분 좋으라고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를 쓰는 모습에서 유치하지만 그래도 ‘아픔’을 느껴서 쓰는 진정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연애에 실패한 청년이 시를 쓸 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가지고 시를 통해서 그 고통을 극복하려 합니다. 우리는 시를 쓸 때 자신이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아픔을 느끼는 대목을 시로 표출을 해야 시인으로서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 말을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의문이 듭니다. 이상적인 것은 자신의 ‘아픔’ 때문에 시를 통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시를 씀으로서 그 사람의 진정성이 순수하게 표출된다는 것은 얼마든지 공감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백일장에서 어떤 시제를 주고 작시를 하라고 하면 거기서 시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까요.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조금 느끼는 것입니다.
6 딴 것을 갖다 대라
‘마누라 얘기하지 말고 처갓집 용마루만 얘기하세요.’
‘내 생각은 그냥 먼 바다에 툭 던져놓고 딴 얘기만 하세요.’
변죽을 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직접 말을 하지 않고 둘러서 말을 하여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누라 얘기를 해야겠는데 직접 마누라 얘길하지 않고 처갓집의 용마루만 화제로 삼는 것입니다.
시에서도 제목과 다른, 전연 상관 없는 본문을 보면 우선은 궁금하고 긴장이 됩니다. 50퍼센트는 시로써 성공한 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딴 것을 갖다 대는 것’의 극단적인 방법이 치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졸시 「엽서」가 있습니다. 제목은 ‘엽서’인데 내용은 엽서에 관한 얘기는 별로 없고 낙엽에 대한 얘기만 있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딴 것’을 대었고 엽서와 낙엽을 치환한 셈입니다.
7 머리로 쓰지 마라
‘시를 쓸 때 생각에 의지하면 항상 늦어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도록 하세요.‘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머리로 쓰지 마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머리라고 하면 이성이 작동하고 따라서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쓴다면 머리로서 궁리를 하므로 지금 쓰는 글에서 자신에게 해로운 글은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여 자신을 그럴 듯하게 수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성복 시인은 머리로 쓰지 말고 ’손은 신뢰하면서 가급적 신속히 쓰세요‘라고 조언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슴 속에서 즉 마음에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이것저것 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빨리 종이에 옮겨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리는 첫째는 그 감정, 정서가 생생할 것이고 둘째는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보자의 시작(詩作)을 보면 감정이 너무 생경하고 유치한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손‘이 좋다고 해도 역시 머리로써 수정·보완하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8 디테일
’시는 디테일을 통한 전체의 복원이에요.‘
’글쓰기의 미로에서 빠져나가기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디테일’을 살피세요.‘
추상이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고 합니다. 산문은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글을 구성하는 일이 많으나 시는 기본적으로 이미지화를 주된 작업으로 한다면 디테일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가 아프다‘가 아니라 ’배가 우리하다‘로, 저 꽃은 아름답다’가 아니라 ‘저 장미꽃은 피바다의 꽃잎을 접고 가시를 달고 있다’는 식으로 적습니다.
디테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오감을 작동하여 자세하고 빈틈없이 꼼꼼하게 관찰을 하여야 합니다. 그 중에서 시각의 몫이 제일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감성이 시간과 공간의 전제하에서 지성과 만날 때 상상이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이 상상이야말로 시작(詩作)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대상의 디테일한 관찰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터닝 포인트, 전환점,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써나가다 보면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을 거치게 마련이에요.’
’시는 반전의 힘이에요.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동양의 전통적이 시작법(詩作법)의 구성 방법에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습니다. 기(起)에서 시상(詩想)을 일으키고, 승(承)에서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전(轉)에서는 장면과 시상을 새롭게 전환시키고, 결(結)에서는 여운이 깃들도록 끝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에서뿐만이 아니고 소설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설의 구성은 도입-전개-위기-절정-대단원인데 결국 기승전결의 흐름과 같습니다.
범박(泛博)하게 말하여 시든지 산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전(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써나가더라도 자신의 깨달음이 있는 곳에서 홱 낚아채면서 전으로 돌아서 전개해 나가면 그 글은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구상으로 잘 이끌어 나가도 멋있는 전이 없으면 그저 평범한 글에 그치고 맙니다.
수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잡다한 신변잡기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을 쓰라고 했는데 그 관점이 바로 전에 해당됩니다. 여행기도 그 고장의 신기한 것만 죽 나열하여서는 좋은 글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곡조로 흐르더라도 한 순간 돌아서서 자신의 깨달음을 적어야 훌륭한 여행기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이 굴러오던 자신이 인생에서 전에 해당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 인생은 그래도 무엇인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성복의 시론 세 가지 책을 읽으면서 수긍이 가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저에게 그래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시의 주인공은 언어이다‘ ’언어를 비틀어라‘ ’대상에 집중하라‘가 그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하던 중에 저보고 한평생 이것저것 참 많이도 했다고 지적하더군요. 서예한다고 심지어 비행기 타고 의정부에도 갔고(사부님이 의정부에 있어서) 난도 키워 봤고(다 죽이고 이제 하나도 없고), 돌 주우러 다니느라고 문경 구랑리도 오르내렸고(사실은 시간이 없어 돈 주고 사러 간 적이 더 많았지만), 노래 배우러도 다녔고, 검도한다고 일본에도 가 보았고, 시 쓴다고 서울로 들락거렸고, 늘어놓고 보니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그다지 큰 물결은 아닐지라도 저의 전을 계기로 삼을 것을 찾아서 이제는 어느 하나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