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돌아가라』 다이닌 가타기리(大忍片桐)

광대한 대양과 잔물결

by 현목

원래 다이닌 가타기리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들을 거의 읽다 보면 그녀가 불교의 선에 심취해 있었고 다이닌 가타기리의 이름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가 궁금해져서 예스24에 들어가서 찾아보니 2011년에 발간된 『침묵으로 돌아가라』와 2012년에 나온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라』는 절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알고 싶어 비싼 중고책을 사서 읽어봤습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천박한 저에게는 내용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 선사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조동종(曹洞宗)의 승려가 되었습니다.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72년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 선 명상센터의 초대 원장이 되었고, 1990년에 암 투병 후에 입적했습니다.


책의 제목이 「침묵으로 돌아가라」입니다. 그럼 도대체 침묵이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형태를 결정할 만큼 중요할까요? 침묵한다는 것은 외부보다는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입니다. 내부의 자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자극을 꺼야 합니다. 우리의 보편적 삶은 먹고 마시고 번식하고 남보다 권력을 누리고 명성을 얻고 재물을 얻고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여기에다 인간은 유한하므로 영적인 삶을 동경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도 이해지만 종교의 근본적인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명 있는 존재는 산속에 있는 나무나, 땅속에서 사는 개미나 땅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다만 인간은 의식이 다른 생명체보다 탁월하여 개념을, 관념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관념을 숭배·추종하면서 영적으로도 영원히 살고 싶다는 ‘영적 이기심’의 발로가 결국 종교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착안한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교는 일원론에 기초해 있다는 것과 둘째는 다이닌 가타기리가 그토록 강조한 지관타좌(只管打坐), 즉 좌선이란 무엇인가, 셋째 종교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와 불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첫째 이 우주를 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일원론입니다. 일원론이란 우주의 근본원리는 오직 하나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근본원리가 물질적인가 정신적인가에 따라 물질적 일원론, 정신적 일원론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일원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자론(單子論)』을 쓴 라이프니츠와 ‘신 즉 자연’이라고 한 스피노자, 그리고 유물론의 마르크스입니다. 반면에 이원론은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로는 영지계와 현상계를 말하는 플라톤, 형상과 질료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신과 물체의 데카르트, 감성과 이성의 칸트가 있고 신과 세계의 기독교도 이원론에 속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의 인간존재의 궁극적 본성은 일원론이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우주 속에 돌기된 존재’이고 ‘광대한 대양(大洋)의 잔물결’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광대한 우주’란 인간이 사리분별하여 내린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우주입니다.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입을 다물라’ ‘그저 걸으라’ ‘그저 하라’고 말하며 단순하게 살라고 합니다.


‘조용한 대양에 조약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퍼져나가다가 결국 대양 속으로 녹아버린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일체 중생의 순간순간 현존하는 존재의 궁극적 성품의 특성이다’라고 다이닌 가타기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물결’이란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의 형태들, 즉 밥 먹고, 세수하고, 직장에 나가 사람들과 관계하고, 걷고……, 하는 것들입니다.


둘째 좌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좌선이란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어 간화선(看話禪)을 중시하는 임제종(臨濟宗)과 묵조선(黙照禪)을 근간으로 하는 조동종(曹洞宗)이 있다는 정도만 압니다. 책들을 읽어보면 화두(話頭)를 가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임제종은 그저 앉아서 좌선이나 하는 조동종을 우습게 아는 경향을 발견했습니다. 좌선에 대해 다이닌 가타기리는 많은 말을 합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인용합니다.

∙깊은 본성에 접하고 싶으면 침묵하고 좌선하라고 한다.

∙좌선할 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①미망과 고통 등 모든 감정을 칼로 잘라낸다. 이것을 지혜라고 한다.

②일체 중생(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좌선은 완전한 고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체험하도록 해주는 근본적 수행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저 앉는 것이다. 그저 침묵의 세계로, 존재의 광대함을 돌아가는 것 이다. 이것이 좌선이다.

∙여러분이 앉는다면(좌선) 그것은 몸과 마음을 떨쳐버리는 것, 몸과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좌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 이전의, 우주 전체인 ’저절로-있을-뿐인-것‘의 표현 또는 현현이다. 이것을 우주적 삶이라고 한다.

∙여전히 좌선은 어떤 목적(예컨대 깨달음)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좌선은 정상에 오르기 위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 수행의 주목적이 아니다. 그릇된 수행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이전과 이후라는 개념적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좌선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좌선은 적정(寂靜)·부동(不動)이라 불리는 존재의 성품과 동일하다.

∙좌선이 우주이다. 우리는 자신을 우주 속으로 내던져야 한다. 그러면 너그러움과 자비와 지혜의 빛이 좌선으로부터 나온다.

∙좌선이란 좌선 차제의 과정 속에 그저 있게 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관타좌이다. 지관타좌는 좌선을 마친 후에 얻는 무엇이 아니다.

∙지관타좌는 과정의 개념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도겐(道元) 선사는 자신의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좌선 수행은 삶과 죽음의 커다란 흐름과 연관되어 있다. 좌선을 하며 앉아 있을 때, 삶과 우리 사이, 죽음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삶과 죽음이, 사물들이 가치를 갖는지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좌선에 대한 다이닌 가타기리의 말 중에 제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몇 가지 있습니다. 좌선이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좌선 자체가 과정이며 목적입니다. 좌선을 통해 개념이 아니라 우주로 자신을 던집니다. 침묵하며 좌선을 함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성품인 적정(寂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셋째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인간에게 왜 종교가 필요할까요. 인간이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종교가 과연 필요할까요. 인간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어머니 아버지가 보이고 교육을 받게 되고 또 어느 날 자신의 마음 속에 ’자아‘가 생깁니다.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단한가?” “죽음이란 나에게 오는 건가” 생각이 많아집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는 동안 사람들과 생기는 갈등도 견뎌야 하고, 언젠가는 노령이 되어 죽음이 눈앞에 왔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으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영원한 생존이 있다면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영원히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그는 마침내 영적인 삶에 귀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계시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깨우쳐 인간에게 보여주는 종교입니다. 신과 세계라는 이원론적 관점이고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성악설에 근거합니다. 그 구체적 예가 성경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의 원죄의 시조가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물려받았고, 예수님이 그 죄를 대속함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기각성의 종교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우주를, 인간의 생을 한눈에 조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에 의하면 ’광대한 대양과 잔물결‘이라는 일원론이며 인간의 궁극적 품성은 ’부처‘라는 성선설에 근거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삼보(三寶)에 귀의하라고 말합니다. 삼보란 불(佛)과 법(法)과 승가(僧伽)입니다. 이것을 굳이 기독교에 적용하면 불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에, 법은 성경에, 승가는 성도(聖徒)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수행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은 사리분별에 의한 지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으로써 이 우주와 연결된다고 본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불교, 다이닌 가타기리 식으로 말하자면 좌선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본성인 적정에 이르고 광대한 우주에 연결되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예로 산을 걸어가는 것과 물고기와 물의 예를 듭니다. 산을 오를 때는 산에 대해 이런 저런 관념을 가지지 말고 산과 일체가 되어 ’그저 걸으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에 대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물속에 들어가서 일체가 되어 헤엄을 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교리가 아니라 ’예배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의 이 말은 제게는 약간 충격적이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신이 우리에게 응답하는 여부를, 또는 우리가 만족을 느끼는지 여부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저 기도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다. 그러한 기도 수행 안에는 기도를 바칠 객체도 없고 기도하는 주체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이다.‘


기독교는 대부분 하나님에게 복 달라고 기도합니다. 건강, 자식, 사업, 교회 부흥 등을 기도하고 응답 여부에 노심초사합니다. 긍정적 결과가 있으면 그것 봐라,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기뻐하고 다른 신자들에게 자랑 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한다고 간증합니다. 그런데 부정적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이 아직 나를 단련시키려고 그런다고 더욱 기도에 열중합니다. 다이닌 가타기리는 하나님의 응답에 상관하지 말고 기도 자체에만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이고 그것이 초조와 불안을 없애고 안전감을 담보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로써 기독교인은 우주(하나님)과 연결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에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배우자가 죽어서 슬퍼하기도 하며, 금전적으로 쪼달려서 좌절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쨌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삶의 원리를 깨닫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말이다. 다시 말해 삶의 원동력은 ’살아감의 지속’입니다, 단순히 무식하게 한 평생 농사짓고 살다가 간 사람도 있고 혹은 대학교수가 되어 살다간 사람도 있습니다. 가타기리의 논리대로 하자면 둘의 차이는 없고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발레리나의 춤 동작은 사라지지만 순간순간 생명의 아름다움을 현현합니다. 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수행(기독교로 말하면 ‘예배와 기도‘)에 따른 각자의 몫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마음의 청정함, 깨끗함, 선하게 살고, 자비(사랑)을 베푸는 것일 수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타이닌 가타기리는 선사(禪師)이면서도 불교에서 상식적인 말들, 즉 연기(緣起) 윤회(輪回), 공(空), 열반(涅槃)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좌선을 하면서 우주(광대한 대양)라는 필터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그저 걸으라‘면서 우주와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타인과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라고 합니다. 보시(布施)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침묵으로 돌아가라』를 읽으면서 불교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이지만 저로서는 종교라는 관점에서는 동질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저의 신앙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終)

keyword